말춤이여, 北까지 퍼져 한반도 恨을 힐링하라'
최종수정 | 2012-12-25 11:17:4
김지하 시인 특별기고
15세기 이탈리아 피렌체 베네치아 중심의 유럽 르네상스가 오늘의 근대문명을 결정했다. 이제 한반도 안에서 절박하고도 급박하게 새로운 세계 문화의 기본 틀이 만들어질 것이 요구되고 있다. 이 땅에서 우주생명과 맞닿아 있는 문화가 창출되는 것이 요구되고 있다. 이것이 네오(신) 르네상스이다.
“그게 가능한 일일까?”라는 질문은 거두라. 이미 그것은 우리의 숙명이요, 세계 전 인류의 운명이다. 민족문화의 부활과 네오 르네상스의 시작 없이는 참다운 민족통일도 있을 수 없다.
우리가 세계에 전할 문화와 가치의 첫 번째는 ‘시김’(판소리의 멋과 맛을 느끼게 해 주는 것으로 소리를 추어올렸다, 꺾어 내렸다, 궁글렸다, 뒤집었다 하면서 다양한 변화를 부여하는 일종의 발성 기법·편집자)이다. 세계는 지금 ‘시김’을 요구하고 있다. ‘시김’은 우리 민족문화의 원형(原形)이다. 왜 ‘시김’이 가치 있는가? ‘발효’이기 때문이다. 무엇이 ‘발효’인가? 삶의 비극성과 고단함을 삶에 대한 총체적 긍정-신명으로 뒤바꿔 내는 것이 바로 발효요, ‘시김’이다. 시김’은 ‘한’에서 출발해서 ‘신명’으로 귀결된다.
한류에는 바로 ‘시김’의 흔적이 담겨 있다. 그래서 한류가 글로벌 차원의 호소력을 가진다. 이제 ‘시김’의 흔적이 아니라 본체를 살려 네오 르네상스까지 밀고 나가야 한다.
▼ 바이칼에서 아메리카까지, 한류의 신명으로 춤추게 하라 ▼
우리는 오랫동안 ‘시김’을 억제하고 살았다. 중국의 압력, 조선시대의 경직, 일제의 억압 때문이었다. 그들은 백성의 ‘신명’이 그만큼 무서웠던 것이다. 그래서 온갖 수단으로 억눌러 그 신명을 차단했다. 그 결과 신명 위에 한(恨)의 그늘이 짙게 드리우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10년 전 2002년 월드컵 당시 젊은이들이 ‘붉은 악마’를 통해서 그 신명을 살려 뜀뛰기 시작했고 ‘한’까지 흔들며 춤추기 시작했다. ‘신명’이 ‘한’을 데리고 놀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시김’이 아니고 무엇인가? 한류에는 ‘시김’이 배어 있다.
이웃 나라 일본에서 ‘욘사마’가, 동남아에서 ‘한류’가 불 밝혀졌다. 케이팝이 퍼지고 마침내 ‘말춤’이 떠오른 것은 모두 ‘시김’의 요소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문명의 격변, 우주적 이상 변동, 세계적 괴변 현상,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완전히 새로운 심리유형―이 모든 것은 ‘시김’을 요구하고 있다. 삶의 비극성과 고단함을 발효시켜 그 한가운데로부터 삶에 대한 총체적 긍정을 솟아나게 하는 지혜―‘시김’의 지혜가 요구되고 있다. 오직 ‘시김’을 통해서만 삶은 운명으로 승화될 수 있다. 운명으로 고양된 삶―이것이 바로 내가 말해 온 ‘흰 그늘’이다. 우리 온 민족이 지금 시김을 구한다. 온 인류가 시김을 기다린다. 온 중생이 지금 시김을 기다린다.
유럽 현대의 영지주의자 루돌프 슈타이너는 이렇게 말했다.
“인류 문명의 대변동기에는, 가난하지만 영롱한 작은 민족, 이른바 ‘성배(聖杯)의 민족’이 나타나서, 다가오는 시대에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체험적으로, 문화적으로 가르쳐 주곤 한다. 로마문명기에 그 민족은 ‘이스라엘’이었다. 그러나 그 로마시대보다 더 근원적인 대전환기인 현대, 오늘 그 민족은 어디에 있는가? 나는 그 민족이 극동에 있다는 것밖에 모른다.”
슈타이너의 일본인 제자인 다카하시 이와오(高橋巖)는 그 민족이 일본이라 착각하고 애쓰다가 좌절하고 결국은 그것이 바로 한민족이라고 깨달은 사람이다. 나는 바로 그 일본인을 통해서 슈타이너의 영적인 통찰을 알게 되었다. 한국인이 세계에 전해야 하는 문화와 지혜는 ‘시김’에서 시작한다.
시김은 논리가 아니다. 시김은 논리, 논의 자체가 무너졌을 때 일어나는 불같은 분발이거나, 배고픔이거나 아니면 번쩍하는 번갯불이다. 이 민족의 시김은 누구나 다 아는 남도소리, 판소리, 탈춤, 육자배기, 무가, 허드렛소리와 불교 및 무속 문화를 중심으로 한다. 그러나 그 근원은 강원도의 정선 아우라지로부터 시작된다.
정선아리랑은 시김새의 첫 뿌리에 속한다. 그것은 ‘넉넉한 월봉(月峰)의 그믐달 밤과 날카로운 초미(初眉)와 눈부신 해돋이’의 동서 결합이다. 그것이 춘향가의 ‘쑥대머리’다. 판소리 사이사이 끼어드는 ‘이완’의 ‘시르라기(쓰레기)춤’, 또는 ‘허벌춤’이 곧 싸이의 ‘말춤’이다. 한갓 심심풀이 ‘허벌춤’이 ‘말춤’이 되어 세계적 호소력을 가진다. 하물며 본격적인 ‘시김’의 축제, ‘ㅱ감(不咸)’과 ‘다물(多勿)’의 예술제가 쏟아진다면? 전 세계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다.
우리의 남도 시김새는 그 주역이 단연 여성이다. 우리 사회에서 ‘여성의 시대’가 한 걸음 나아가면 이는 세계적 차원에서 충격파를 만들어 낸다. 우선 일본에 충격이 전해진다. 일본 철학계의 중핵이라 할 교토대의 쓰루미 준스케(鶴見俊輔)는 내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본의 진정한 해방은 여성의 문화혁명이다. 일본 여성이 문화적으로 주체를 자각할 때 일본은 해방된다. 일본 여성은 한국문화가 자기의 숨은 주체임을 깨달을 때 일어선다. 곧 그날이 올 것이다. 천 년 전 일본 교토 왕실에는 백제의 문화 전통을 죽음으로 지킨 여성들이 있었고, 15세기에는 가톨릭을 죽음으로 지킨 여성들이 있었고, 19세기 말에는 사회주의를 지킨 여성들이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여성이 주체가 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 뒤, ‘욘사마’가 왔고 뒤이어 ‘료조(龍女)’ ‘레키조(歷女)’가 왔고 이어서 수백만 주부들의 ‘아메 요코’라는 시장의 대변혁이 왔다. 그때 악랄한 일본 극우파 이시하라 신타로는 “여편네들이 설치니 천벌을 받을 것이다”라고 했다. 과연 대지진과 원전사고가 왔다.
그 여성들이 사라졌다. 완전히 사라졌을까? 나는 한반도에서 여성 문화 권력이 일어서는 날, 그날 곧이어 일본 여성이, 그리고 곧이어 미국의 커피 파티, 즉 ‘힐러리 그룹’이 일어서리라고, 그리하여 새 세계가 오리라고 믿는다. 이것이 무엇인가? 남성 지배 사회가 들이닥쳤던 것은 대략 3000년 전쯤 된다. 이제 여성은 3000년의 굴레를 벗고 자신을 되찾기 시작했다. 이것이야말로 3000년 그늘 속에서 솟아오르는 흰 섬광, 즉 ‘흰 그늘’ 아닌가! 바로 ‘시김새’ 아닌가! 그래서 여성은 ‘시김’의 예술가이다. ‘시김’은 여성을 통해 한 걸음 더 탄탄해진다. 여성이 주류 문화, 주류 사회를 주도하는 날, ‘시김’을 원형으로 삼은 한류 역시 더 탄탄해진다.
이 한류의 소식이 북한에 전해진다면? 전 세계를 열광시킨 말춤의 소식이 북한에 퍼진다면? 한류가 북한 전체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는 새로운 ‘부(富)의 원천’이라는 소식이 퍼진다면? 평안도, 함경도의, 그리고 금강산 깊이깊이 가라앉아 있는, 그러나 한번 떠오르면 좀체 꺼지지 않을 마치 아우라지의 불멸의 시김새들이 되살아나기 시작하지 않을까?
우리 문화의 원형―‘시김’은 한반도 안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러시아의 동남부 ‘이르쿠츠크’ 황야에서 ‘샤먼 마하’라는 늙은이를 만난 적 있다. 자리를 뜨려고 일어서니까 그가 한마디 던진다.
“스구리 스구리 오야히야니 스구리스구.”
그래, 발해시대 이후부터 전해지는 연해주 가요라고 한다. 무슨 뜻일까? 뜻은 알 도리가 없다. 그러나 그 리듬에서 나는 금방 1930년대 후반에서 40년대 초반까지 스탈린에 의해 삶의 터전이던 연해주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뿌리 뽑혀 화물차에 짐짝처럼 실려 중앙아시아 황야에 내버려졌던 30만의 ‘조선 유민’을 떠올렸다. 블라디보스토크와 연해주― 이곳은 발해의 땅이었다.
중국은 발해가 저희 역사라고 주장하고 나아가, 우리 시조할머니인 ‘웅녀(熊女)’까지도 저희 조상이라고 싱안링(興安嶺)에 동상을 세워 놓고 초등학생들에게 참배를 시키고 있다. 그러나 중화패권주의의 극성 한가운데에서 만주, 바이칼, 동남시베리아, 600만 주민들로부터 무엇인가 떠오를 것이다. 신화, 전설, 이야기, 노래, 시 들! 이제 우리는 그것을 찾으러 가야 한다.
러시아와 중국은 근대문명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고 전체주의로 치달렸었다. 그들의 정신과 영혼을 복원하는 힐링 파워는, 바로 러시아 동부, 중국의 동북부에 잠들어 있는 옛 한국인들의 신화, 전설, 이야기, 노래, 시에 깃들어 있지 않을까? 이제 우리 젊은이들은 이것들을 찾아서 되살리러 가야 하지 않는가?
어찌 시베리아, 만주, 연해주뿐인가? 오호츠크 바다 건너 캄차카로 간다. 사모아 발랑카의 분출수는 한없이 뜨겁다. 그런데 오호츠크는 그만큼이나 차갑다. 이것이 커다란 우주변동의 시작이다.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은 따뜻한 유리(琉璃)세계의 조짐이다. 그래서 캄차카는 우리의 신화에 아주 가깝다. 가깝다. 무엇이? ‘장승굿’을 ‘빔차’에서 봤다. 똑같다. 장승 위치에서부터 무당너스레까지 너무나 똑같아서 지루할 지경이다. 나는 페트로파블롭스카야 역사박물관으로 가서 그곳 소장인 러시아 고고학자 비에라 박사를 만났다. 그로부터 이 말을 들었다.
“캄차카 신화는 9000년의 역사를 가진다. 약 3000개가 있다. 그중에 현재 채취 가능한 것만 2500개다. 중요한 것은 이 신화들의 근본은 당신들 한국인이다. 캄차카 신화는 아직까지 유럽의 그 어떤 신화학자도 채집한 적이 없다.
또한 캄차카 신화는 중앙아시아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 신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신화가 담고 있는 우주적 미스터리이다. 캄차카 신화는 숨어 있는 미스터리도 다르다. 캄차카 신화는, 지금은 베링 해에 잠긴 몽골리언 루트의 상호 소통 민요다. 베링 해가 점점 넓어지면서, 아시아와 아메리카를 이어 주던 통로인 몽골리언 루트가 약 6000년 전에 완전히 끊기기 전까지는 양쪽 사람들이 서로 오가며 살았을 것이다. 그래서 캄차카 신화에는 아시아와 아메리카 사이의 상호 소통, 즉 공명(共鳴)이 들어 있다.”
그는 내게 이런 옛 신화 한 토막을 들려주었다.
“이카이 이카이 데에무 와이스미 코낭카투이.
새야 새야 네가 가는 곳이 어디니?
내가 발 담그고 있는 이 큰 바다 밑의 저 새파란 새 하늘 아니야?”
어디선가 들어 봤다. 그렇다. ‘바다 밑에 새파란 새 하늘이 존재한다’라는 신화는 이 땅에도 있다. 부산 가덕도 앞바다는 ‘미친 바다’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그 바다 밑에 새파란 새 하늘이 있다는 전설을 나는 부산에 갈 때마다 듣는다.
이렇듯 옛 한국인들의 발자취는 바이칼에서 동남시베리아 연해주, 만주, 한반도, 일본, 캄차카에 이른다. 그리고 몽골리언 루트를 따라 아메리카로 넘어간다. 곳곳에 흩어져 있는 옛 한국인의 문화 원형을 찾아 부활시키는 작업은 당연히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문화 원형 부활에까지 이르게 된다. 인디언의 문화 원형이 부활된다면, 미국 사회 전체에, 우리와 영혼의 차원에서 통할 수 있는 새롭고 중요한 문화적 유전자가 추가된다.
그렇다. 우리의 ‘네오 르네상스’의 목적은 바로 ‘한국이 교차로가 되어 중국, 러시아, 일본, 미국을 이끌고 엮어 내는 문화와 가치를 만드는 것’이다. 이는 곧 한류로 하여금 새로운 ‘우주생명의 이치’에 도달하도록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이 바로 이 문명 격변기에 요구되는 흰 그늘이고 ‘시김’이다. 이는 곧 문명 격변기에 겪을 수밖에 없는 삶의 고단함과 애달픔에 대한 ‘힐링’ 아닌가!
김지하 시인 특별기고
우리는 이제 한국, 일본, 중국, 러시아, 미국 이 다섯 나라를 이끌어 엮어 내는 세계적 신(新)르네상스 운동을 결단하지 않으면 안 된다.
15세기 이탈리아 피렌체 베네치아 중심의 유럽 르네상스가 오늘의 근대문명을 결정했다. 이제 한반도 안에서 절박하고도 급박하게 새로운 세계 문화의 기본 틀이 만들어질 것이 요구되고 있다. 이 땅에서 우주생명과 맞닿아 있는 문화가 창출되는 것이 요구되고 있다. 이것이 네오(신) 르네상스이다.
“그게 가능한 일일까?”라는 질문은 거두라. 이미 그것은 우리의 숙명이요, 세계 전 인류의 운명이다. 민족문화의 부활과 네오 르네상스의 시작 없이는 참다운 민족통일도 있을 수 없다.
우리가 세계에 전할 문화와 가치의 첫 번째는 ‘시김’(판소리의 멋과 맛을 느끼게 해 주는 것으로 소리를 추어올렸다, 꺾어 내렸다, 궁글렸다, 뒤집었다 하면서 다양한 변화를 부여하는 일종의 발성 기법·편집자)이다. 세계는 지금 ‘시김’을 요구하고 있다. ‘시김’은 우리 민족문화의 원형(原形)이다. 왜 ‘시김’이 가치 있는가? ‘발효’이기 때문이다. 무엇이 ‘발효’인가? 삶의 비극성과 고단함을 삶에 대한 총체적 긍정-신명으로 뒤바꿔 내는 것이 바로 발효요, ‘시김’이다. 시김’은 ‘한’에서 출발해서 ‘신명’으로 귀결된다.
한류에는 바로 ‘시김’의 흔적이 담겨 있다. 그래서 한류가 글로벌 차원의 호소력을 가진다. 이제 ‘시김’의 흔적이 아니라 본체를 살려 네오 르네상스까지 밀고 나가야 한다.
대선前 박근혜 당선인 만난 김지하 시인 유신시대 대표적인 저항시인 김지하 씨는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여성 대통령론’을 주창하며 박근혜 지지를 선언했다. 13일 김 시인이 박근혜 당선인과 강원 원주시 박경리 토지문학관에서 만나 환담하는 모습. 원주=김동주 기자 zoo@donga.com
▼ 바이칼에서 아메리카까지, 한류의 신명으로 춤추게 하라 ▼
우리는 오랫동안 ‘시김’을 억제하고 살았다. 중국의 압력, 조선시대의 경직, 일제의 억압 때문이었다. 그들은 백성의 ‘신명’이 그만큼 무서웠던 것이다. 그래서 온갖 수단으로 억눌러 그 신명을 차단했다. 그 결과 신명 위에 한(恨)의 그늘이 짙게 드리우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10년 전 2002년 월드컵 당시 젊은이들이 ‘붉은 악마’를 통해서 그 신명을 살려 뜀뛰기 시작했고 ‘한’까지 흔들며 춤추기 시작했다. ‘신명’이 ‘한’을 데리고 놀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시김’이 아니고 무엇인가? 한류에는 ‘시김’이 배어 있다.
이웃 나라 일본에서 ‘욘사마’가, 동남아에서 ‘한류’가 불 밝혀졌다. 케이팝이 퍼지고 마침내 ‘말춤’이 떠오른 것은 모두 ‘시김’의 요소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문명의 격변, 우주적 이상 변동, 세계적 괴변 현상,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완전히 새로운 심리유형―이 모든 것은 ‘시김’을 요구하고 있다. 삶의 비극성과 고단함을 발효시켜 그 한가운데로부터 삶에 대한 총체적 긍정을 솟아나게 하는 지혜―‘시김’의 지혜가 요구되고 있다. 오직 ‘시김’을 통해서만 삶은 운명으로 승화될 수 있다. 운명으로 고양된 삶―이것이 바로 내가 말해 온 ‘흰 그늘’이다. 우리 온 민족이 지금 시김을 구한다. 온 인류가 시김을 기다린다. 온 중생이 지금 시김을 기다린다.
유럽 현대의 영지주의자 루돌프 슈타이너는 이렇게 말했다.
“인류 문명의 대변동기에는, 가난하지만 영롱한 작은 민족, 이른바 ‘성배(聖杯)의 민족’이 나타나서, 다가오는 시대에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체험적으로, 문화적으로 가르쳐 주곤 한다. 로마문명기에 그 민족은 ‘이스라엘’이었다. 그러나 그 로마시대보다 더 근원적인 대전환기인 현대, 오늘 그 민족은 어디에 있는가? 나는 그 민족이 극동에 있다는 것밖에 모른다.”
슈타이너의 일본인 제자인 다카하시 이와오(高橋巖)는 그 민족이 일본이라 착각하고 애쓰다가 좌절하고 결국은 그것이 바로 한민족이라고 깨달은 사람이다. 나는 바로 그 일본인을 통해서 슈타이너의 영적인 통찰을 알게 되었다. 한국인이 세계에 전해야 하는 문화와 지혜는 ‘시김’에서 시작한다.
시김은 논리가 아니다. 시김은 논리, 논의 자체가 무너졌을 때 일어나는 불같은 분발이거나, 배고픔이거나 아니면 번쩍하는 번갯불이다. 이 민족의 시김은 누구나 다 아는 남도소리, 판소리, 탈춤, 육자배기, 무가, 허드렛소리와 불교 및 무속 문화를 중심으로 한다. 그러나 그 근원은 강원도의 정선 아우라지로부터 시작된다.
정선아리랑은 시김새의 첫 뿌리에 속한다. 그것은 ‘넉넉한 월봉(月峰)의 그믐달 밤과 날카로운 초미(初眉)와 눈부신 해돋이’의 동서 결합이다. 그것이 춘향가의 ‘쑥대머리’다. 판소리 사이사이 끼어드는 ‘이완’의 ‘시르라기(쓰레기)춤’, 또는 ‘허벌춤’이 곧 싸이의 ‘말춤’이다. 한갓 심심풀이 ‘허벌춤’이 ‘말춤’이 되어 세계적 호소력을 가진다. 하물며 본격적인 ‘시김’의 축제, ‘ㅱ감(不咸)’과 ‘다물(多勿)’의 예술제가 쏟아진다면? 전 세계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다.
우리의 남도 시김새는 그 주역이 단연 여성이다. 우리 사회에서 ‘여성의 시대’가 한 걸음 나아가면 이는 세계적 차원에서 충격파를 만들어 낸다. 우선 일본에 충격이 전해진다. 일본 철학계의 중핵이라 할 교토대의 쓰루미 준스케(鶴見俊輔)는 내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본의 진정한 해방은 여성의 문화혁명이다. 일본 여성이 문화적으로 주체를 자각할 때 일본은 해방된다. 일본 여성은 한국문화가 자기의 숨은 주체임을 깨달을 때 일어선다. 곧 그날이 올 것이다. 천 년 전 일본 교토 왕실에는 백제의 문화 전통을 죽음으로 지킨 여성들이 있었고, 15세기에는 가톨릭을 죽음으로 지킨 여성들이 있었고, 19세기 말에는 사회주의를 지킨 여성들이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여성이 주체가 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 뒤, ‘욘사마’가 왔고 뒤이어 ‘료조(龍女)’ ‘레키조(歷女)’가 왔고 이어서 수백만 주부들의 ‘아메 요코’라는 시장의 대변혁이 왔다. 그때 악랄한 일본 극우파 이시하라 신타로는 “여편네들이 설치니 천벌을 받을 것이다”라고 했다. 과연 대지진과 원전사고가 왔다.
그 여성들이 사라졌다. 완전히 사라졌을까? 나는 한반도에서 여성 문화 권력이 일어서는 날, 그날 곧이어 일본 여성이, 그리고 곧이어 미국의 커피 파티, 즉 ‘힐러리 그룹’이 일어서리라고, 그리하여 새 세계가 오리라고 믿는다. 이것이 무엇인가? 남성 지배 사회가 들이닥쳤던 것은 대략 3000년 전쯤 된다. 이제 여성은 3000년의 굴레를 벗고 자신을 되찾기 시작했다. 이것이야말로 3000년 그늘 속에서 솟아오르는 흰 섬광, 즉 ‘흰 그늘’ 아닌가! 바로 ‘시김새’ 아닌가! 그래서 여성은 ‘시김’의 예술가이다. ‘시김’은 여성을 통해 한 걸음 더 탄탄해진다. 여성이 주류 문화, 주류 사회를 주도하는 날, ‘시김’을 원형으로 삼은 한류 역시 더 탄탄해진다.
이 한류의 소식이 북한에 전해진다면? 전 세계를 열광시킨 말춤의 소식이 북한에 퍼진다면? 한류가 북한 전체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는 새로운 ‘부(富)의 원천’이라는 소식이 퍼진다면? 평안도, 함경도의, 그리고 금강산 깊이깊이 가라앉아 있는, 그러나 한번 떠오르면 좀체 꺼지지 않을 마치 아우라지의 불멸의 시김새들이 되살아나기 시작하지 않을까?
우리 문화의 원형―‘시김’은 한반도 안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러시아의 동남부 ‘이르쿠츠크’ 황야에서 ‘샤먼 마하’라는 늙은이를 만난 적 있다. 자리를 뜨려고 일어서니까 그가 한마디 던진다.
“스구리 스구리 오야히야니 스구리스구.”
그래, 발해시대 이후부터 전해지는 연해주 가요라고 한다. 무슨 뜻일까? 뜻은 알 도리가 없다. 그러나 그 리듬에서 나는 금방 1930년대 후반에서 40년대 초반까지 스탈린에 의해 삶의 터전이던 연해주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뿌리 뽑혀 화물차에 짐짝처럼 실려 중앙아시아 황야에 내버려졌던 30만의 ‘조선 유민’을 떠올렸다. 블라디보스토크와 연해주― 이곳은 발해의 땅이었다.
중국은 발해가 저희 역사라고 주장하고 나아가, 우리 시조할머니인 ‘웅녀(熊女)’까지도 저희 조상이라고 싱안링(興安嶺)에 동상을 세워 놓고 초등학생들에게 참배를 시키고 있다. 그러나 중화패권주의의 극성 한가운데에서 만주, 바이칼, 동남시베리아, 600만 주민들로부터 무엇인가 떠오를 것이다. 신화, 전설, 이야기, 노래, 시 들! 이제 우리는 그것을 찾으러 가야 한다.
러시아와 중국은 근대문명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고 전체주의로 치달렸었다. 그들의 정신과 영혼을 복원하는 힐링 파워는, 바로 러시아 동부, 중국의 동북부에 잠들어 있는 옛 한국인들의 신화, 전설, 이야기, 노래, 시에 깃들어 있지 않을까? 이제 우리 젊은이들은 이것들을 찾아서 되살리러 가야 하지 않는가?
어찌 시베리아, 만주, 연해주뿐인가? 오호츠크 바다 건너 캄차카로 간다. 사모아 발랑카의 분출수는 한없이 뜨겁다. 그런데 오호츠크는 그만큼이나 차갑다. 이것이 커다란 우주변동의 시작이다.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은 따뜻한 유리(琉璃)세계의 조짐이다. 그래서 캄차카는 우리의 신화에 아주 가깝다. 가깝다. 무엇이? ‘장승굿’을 ‘빔차’에서 봤다. 똑같다. 장승 위치에서부터 무당너스레까지 너무나 똑같아서 지루할 지경이다. 나는 페트로파블롭스카야 역사박물관으로 가서 그곳 소장인 러시아 고고학자 비에라 박사를 만났다. 그로부터 이 말을 들었다.
“캄차카 신화는 9000년의 역사를 가진다. 약 3000개가 있다. 그중에 현재 채취 가능한 것만 2500개다. 중요한 것은 이 신화들의 근본은 당신들 한국인이다. 캄차카 신화는 아직까지 유럽의 그 어떤 신화학자도 채집한 적이 없다.
또한 캄차카 신화는 중앙아시아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 신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신화가 담고 있는 우주적 미스터리이다. 캄차카 신화는 숨어 있는 미스터리도 다르다. 캄차카 신화는, 지금은 베링 해에 잠긴 몽골리언 루트의 상호 소통 민요다. 베링 해가 점점 넓어지면서, 아시아와 아메리카를 이어 주던 통로인 몽골리언 루트가 약 6000년 전에 완전히 끊기기 전까지는 양쪽 사람들이 서로 오가며 살았을 것이다. 그래서 캄차카 신화에는 아시아와 아메리카 사이의 상호 소통, 즉 공명(共鳴)이 들어 있다.”
그는 내게 이런 옛 신화 한 토막을 들려주었다.
“이카이 이카이 데에무 와이스미 코낭카투이.
새야 새야 네가 가는 곳이 어디니?
내가 발 담그고 있는 이 큰 바다 밑의 저 새파란 새 하늘 아니야?”
어디선가 들어 봤다. 그렇다. ‘바다 밑에 새파란 새 하늘이 존재한다’라는 신화는 이 땅에도 있다. 부산 가덕도 앞바다는 ‘미친 바다’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그 바다 밑에 새파란 새 하늘이 있다는 전설을 나는 부산에 갈 때마다 듣는다.
이렇듯 옛 한국인들의 발자취는 바이칼에서 동남시베리아 연해주, 만주, 한반도, 일본, 캄차카에 이른다. 그리고 몽골리언 루트를 따라 아메리카로 넘어간다. 곳곳에 흩어져 있는 옛 한국인의 문화 원형을 찾아 부활시키는 작업은 당연히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문화 원형 부활에까지 이르게 된다. 인디언의 문화 원형이 부활된다면, 미국 사회 전체에, 우리와 영혼의 차원에서 통할 수 있는 새롭고 중요한 문화적 유전자가 추가된다.
그렇다. 우리의 ‘네오 르네상스’의 목적은 바로 ‘한국이 교차로가 되어 중국, 러시아, 일본, 미국을 이끌고 엮어 내는 문화와 가치를 만드는 것’이다. 이는 곧 한류로 하여금 새로운 ‘우주생명의 이치’에 도달하도록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이 바로 이 문명 격변기에 요구되는 흰 그늘이고 ‘시김’이다. 이는 곧 문명 격변기에 겪을 수밖에 없는 삶의 고단함과 애달픔에 대한 ‘힐링’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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