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사람들

30여년간 외교관 지낸 남편 은퇴하자 부인, 공예품 수천점으로 문화원 열어

달빛아래서 2013. 11. 3. 00:30

 

이 부부의 20년 열정, 중남미를 통째 옮겨오다

  • 김충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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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 2013.11.02 03:12

    [중남미문화원 개관 20주년… 이곳 만든 이복형 前 대사·홍갑표 이사장 부부]

    30여년간 외교관 지낸 남편 은퇴하자 부인, 공예품 수천점으로 문화원 열어
    미술관·조각 공원 갖춘 관광명소 돼
    "퇴직금·사업해서 번 돈 여기 다 쏟아… 문화는 나눔… 미래세대 위한 곳 되길"

    자유 진영과 공산 진영이 대립하던 1960~80년대, 이복형(81) 전 대사의 임무는 중남미에서 한국의 입지를 넓히고 북한 진출을 차단하는 것이었다. '캐스팅보터' 역할을 하던 중남미 국가를 우리 편으로 만들어야 UN에서 한국에 유리한 안건이 통과될 수 있었다. 체재비가 부족해 허름한 연립주택에서 살면서도 매일같이 현지 명사들을 초청해 연회를 열고 한국을 알렸다. 가난한 나라 외교관 형편에 요리사를 둘 수도 없었다. 파티 준비, 음식 장만 모두 부인 홍갑표(79) 여사의 몫이었다. 홍 여사는 매번 십수 명 손님 식사를 준비하며 이들에게 한국 문화와 전통을 알리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꽃 살 돈이 없어 공원에 핀 야생화를 꺾어다 식탁 장식을 하기도 했다.

    1967년 멕시코 1등 서기관으로 중남미와 인연을 맺은 이 전 대사는 코스타리카, 도미니카, 아르헨티나, 멕시코 대사를 거쳤고, 1993년 은퇴했다. 남편이 은퇴하자 부인이 말했다. "지난 30여년간 당신의 춤을 함께 췄으니, 여생은 나의 춤을 함께 춥시다." 문화·예술에 조예가 깊던 홍 여사는 중남미에서 모은 미술·공예품으로 경기도 고양에 '중남미문화원'을 열었다.

    
	지난달 25일 경기도 고양 중남미문화원 제3전시실에서 이복형(왼쪽)·홍갑표 부부가 문화원을 가꿔 온 지난 20년을 회고하며 활짝 웃고 있다.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은 이 문화원을 ‘고대 마야 문명으로 시작해 오늘의 중남미 문화에 이르기까지 공간과 시간을 뛰어넘어 문화의 위대함을 느낄 수 있는 곳’으로 평했다
    지난달 25일 경기도 고양 중남미문화원 제3전시실에서 이복형(왼쪽)·홍갑표 부부가 문화원을 가꿔 온 지난 20년을 회고하며 활짝 웃고 있다.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은 이 문화원을 ‘고대 마야 문명으로 시작해 오늘의 중남미 문화에 이르기까지 공간과 시간을 뛰어넘어 문화의 위대함을 느낄 수 있는 곳’으로 평했다. /성형주 기자
    지난 26일 중남미문화원이 개관 20주년을 맞았다. 고양향교 옆 자그마한 박물관으로 시작했던 문화원은 미술관(1996년), 조각 공원(2001년), 종교 전시관(2011년) 등을 갖춘 복합 문화 공간으로 발전했다. 홍갑표 중남미문화원 이사장이 수집한 예술품에 중남미 10여 개국으로부터 기증받은 다양한 전시물이 더해졌다. 마야·아스테카·잉카 고대 문명과 스페인 식민 시대 유물 3000여점, 각종 중남미 역사·문화 관련 자료가 한데 모여 있는 중남미문화원은 20년 새 경기 북부의 관광 명소로 자리 잡았다.

    문화원은 두 부부의 땀으로 이뤄졌다. 건축물 설계부터 전시물 배치까지 모두 홍 이사장의 머리에서 나왔다. 1993년 이 전 대사가 받은 퇴직금 2억원이 몽땅 박물관 건축에 들어갔다. 홍 이사장이 중남미에서 가발·속눈썹 사업으로 번 돈도 모두 전시 시설 건립에 쓰였다. 1997년 외환 위기 때는 이자를 제대로 갚지 못해 위기를 맞기도 했다. 문화원 건립 비용은 홍 이사장의 근심거리였다. "정부에서 잘한다고 훈장을 주긴 해도 시멘트를 보내주진 않아요. 주변의 반대도 심했지만, 가치 있는 일에 열정을 쏟는 것은 충분히 행복한 일입니다."

    이 전 대사의 손바닥엔 큼직한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전 이곳의 관리인 겸 정원사입니다. 지난 20년간 아내의 춤을 함께 췄지요. 제 손으로 가꾼 문화원이 이제 중남미 민간 외교센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문화원에선 중남미 국가들의 각종 외교·문화 행사가 열린다. 이 전 대사의 현직 시절과는 반대로 이젠 중남미 국가들이 먼저 한국에 손을 내민다. "지구 반대편 한국에 중남미문화원이 있다는 사실에 무척 고마워합니다. 큰 보람을 느끼죠."

    이 전 대사와 홍 이사장 부부는 문화원을 재단법인화해 일찌감치 사회에 환원했다. "사업체라면 자녀에게 물려줬겠죠. 그러나 문화는 나누는 거지 세습하는 게 아닙니다. 이곳을 찾는 어린 학생들을 보면 힘이 납니다. 더 멋진 문화원으로 가꿔 이 아이들에게 물려줄 것입니다."(홍갑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