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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가 된 삼성생명 부사장…봄 파머스가든 곽상용 대표

by 달빛아래서 2014. 10. 24.
  • 농부가 된 삼성생명 부사장…봄 파머스가든 곽상용 대표

     

    “세상 잣대가 아닌 내가 원하는 삶 살자!”

  • 황은순
    주간조선 기자

 

입력 : 2014.10.23 16:34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남한강변에 숨어있는 3만3000여㎡(1만여평)의 정원 ‘봄 파머스가든’. 우람한 둥치의 벚나무 길은 강으로 이어지고, 작은 숲으로 난 산책길에는 구절초·산비장이·쑥부쟁이 등 야생화가 향기를 내품고 있다. 넓은 잔디밭 앞쪽으로는 갤러리로 사용하는 낮은 나무 건물 두 동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길게 이어져 있다. 한쪽에는 이탈리안 레스토랑 ‘꽃’이 있다. 지난 10월 4일 저녁, 김인옥 화가의 따뜻한 채색 동양화가 전시장에 걸리고, 갤러리 앞 작은 무대에서는 재즈 음악회가 열렸다. 연주를 맡은 팀은 폴란드 출신의 재즈 기타리스트 나팔 사르네키가 이끄는 다국적 퀸텟(5중주). 올해로 11회째인 자라섬 재즈 페스티벌에 초대된 팀이다.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마친 사람들이 하나둘 무대 앞으로 모여들었다. 잔디밭에 놓인 100여개의 객석이 금방 꽉 채워지고, 일부는 와인 잔을 들고 객석 뒤편에 피워 놓은 모닥불 근처로 모여들었다. 무대 위로 ‘봄 파머스가든’의 곽상용 대표가 마이크를 들고 올라왔다.

“저는 귀농 1년차 농부입니다. 봄의 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사실 대표머슴입니다.”

곽 대표의 인사말을 시작으로 2시간 동안 재즈 연주가 이어지면서 정원의 가을밤이 깊어갔다. 음악회가 진행되는 동안 손님들과 함께 마신 와인으로 적당히 붉어진 곽 대표의 얼굴은 건강해 보였다. 곽 대표의 현재 모습은 1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다. 지난해까지 곽 대표의 직함은 삼성생명 부사장이었다. 곽 대표의 혈압과 혈당은 약을 먹어도 다스리기 힘들 정도의 위험한 수준이었다. 스트레스 지수는 10단계 중 가장 높은 10이었다. ‘농부’가 된 요즘 곽 대표는 혈압 약을 먹지 않아도 170까지는 조절이 가능하다. 혈당도 정상이다. 스트레스 지수는 가장 낮은 1단계로 떨어졌다. 부담스럽던 몸무게도 6㎏이 빠졌다.
/사진=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사진=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인생이 바뀌니 수입도 당연히 달라졌다. 수억원대 연봉이 꽂히던 통장은 입금은 없고 출금 전용이 됐다. 올 3월에 문을 열었기 때문에 자리를 잡기까지 통장에 돈이 들어오기는 당분간 힘들다. 그렇지만 곽 대표는 누구보다 부자다. 돈과는 비교할 수 없는 건강을 되찾았고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연주회가 시작되기 전 곽 대표와 만났다. 곽 대표는 행사 때문에 오랜만에 양복을 입었더니 어색하다고 했다. 삼성생명을 그만두고 양복을 입은 것은 고작 두세 번이라고 했다.

그는 1년 만에 작업복이 익숙한 농부가 됐다. 넥타이 매고 컴퓨터 앞에서 머리를 쥐어짜는 대신 청바지를 입고 흙을 만진다. 숫자와 싸우는 대신 상추 모종을 심고 토마토를 키우고 고추나무에 지지대를 세운다. 풀밭에 주저앉아 인부들과 함께 먹는 밥이 고급 레스토랑의 스테이크와 비교할 수 없이 맛있다. 새참까지 하루 다섯 끼를 꼬박 챙겨 먹지만 금방 소화가 된다. 동네 농부들에게 농사를 배우는 재미도 쏠쏠하다. 머리가 복잡해지면 잡초를 뽑는다. 잡초 뽑기는 최고의 집중력을 요구한다. 가장 단순해지는 순간, 그는 가장 행복하다. 곽 대표가 이 행복을 찾기까지는 30년이 걸렸다.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행정고시에 합격한 후 재정경제부(현 기획재정부) 국제금융국, 청와대 경제수석실 행정관 공무원으로 인생 1막을 정신없이 지냈다. 2002년 삼성그룹으로 자리를 옮겨 삼성그룹 구조조정본부 상무, 삼성그룹 전략기획실 전무를 거쳐 삼성생명 부사장까지 ‘삼성맨 11년’으로 인생 2막을 살았다. 봄 파머스가든에서 시작한 인생 3막의 속도에 비해 인생 1, 2막은 브레이크 없는 질주였다.

곽 대표는 1997년 IMF 외환위기 때 외화자금과에 근무했다. 기재부 장관을 지낸 윤증현, 김석동씨가 당시 그의 실장, 과장이었다. 시중 은행들의 파산을 막기 위해 매일 도쿄, 런던, 뉴욕에 손을 벌려 외화를 빌리는 것이 일이었다. 하루를 넘기는 것이 전쟁 같았다. 새벽 4시에 퇴근했다 아침 9시에 출근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힘겨운 외환협상의 끝에서 그를 기다린 건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의 조사였다. “친·인척은 물론 아이들 통장까지 세 달 동안 샅샅이 뒤졌더라. 혹시 달러 사재기 했을까봐. 먼지 한 톨만 나왔어도 그때 살아남지 못했을 거다.” 곽 대표의 회고다.

김대중 정부의 청와대 경제수석실에서 담당했던 일은 기업구조조정이었다.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우울증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기도 했다. 민간 기업으로 옮기면 일이 좀 덜어질까. 외국계 기업을 알아보던 중 삼성에서 ‘콜’이 왔다. 잠깐만 있어야지 생각한 것이 11년이 됐다. 구조조정본부, 법인영업, 연구소, 2년마다 자리를 옮겼다. 공무원 때보다 훨씬 힘들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일하는 동안 몸은 계속 망가져 갔다. 결국 2년 전 몸이 위험신호를 보냈다. 곽 대표는 “저녁식사 자리에서 나도 모르게 헛소리를 했다. 다들 병원에 가보라고 해서 검사를 받아보니 약한 뇌출혈이 왔다 갔다고 하더라. 더 이상 회사를 위해 전념할 수 없겠다 싶었다”고 말했다.

엔진과열 상태로 계속 과속 페달을 밟을 수는 없었다. 가족이 자랑스러워하고 세상의 잣대에 맞춘 삶이 아닌 내가 진정으로 행복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마음을 비운 자리에 그동안 돌아보지 못했던 것들이 들어왔다. “농부의 꿈이 있었다. 머리가 아닌 몸을 쓰는 일이 하고 싶었다. 산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나무에 대해서도 공부하고 싶었다. 억지로 버텨서 사장까지 올라간다고 해도 건강을 비롯해서 너무 많은 것을 잃어버려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 늦기 전에 다른 인생을 살고 싶었다.”

박근희 삼성생명 부회장에게 회사를 그만두고 싶다는 뜻을 전했더니 “아직 젊으니 1년만 더 생각해보라”는 답이 돌아왔다. 1년을 기다린 후 지난해 10월 박 부회장을 다시 찾아가 “연말 인사에서 저는 제외해 달라”고 말했다.

‘농사를 짓자’는 목표를 세우고 여러 방향을 모색했다. 뉴질랜드나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농사를 지어볼까, 전문 농업 경영인으로 나서볼까. 그러다 지인 몇 사람과 정원을 계획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힐링캠프에 출연했을 때 촬영을 하면서 유명해진 경기도 청평군 류미재 갤러리 대표도 함께했다. 시작할 땐 대표도 맡지 않고 참여만 할 생각이었는데 일이 진행되는 동안 나머지 사람들은 손을 떼고 류미재 대표와 둘만 남게 됐다.

그가 생각하는 봄 파머스가든은 문화가 있는 자연정원이다. 이발한 것처럼 손질된 관상용 나무들과 알록달록 꽃으로 꾸며진 화려한 정원이 아니다. 자연과 시간이 키운 나무들과 계절 따라 피고 지는 야생화들이 어우러진 건강한 정원이다. 성형미인이 아니라 자연미인 같은 곳. 우르르 몰려와서 화려한 꽃밭을 배경으로 사진 찍고 떠나기보다 자연을 마음에 담고 쉬어갈 수 있는 정원이었으면 싶다. 정원 한쪽에는 밭을 만들어 농사를 짓고 관람객도 농사를 체험해보게 할 생각이다. 가을걷이가 끝나면 축제를 벌이듯 정원에서 수확한 농작물로 음식을 만들어 먹고 마음 맞는 사람들이 모여 소박한 파티를 즐기는 곳, 바로 곽 대표가 꿈꾸는 정원이다. 곽 대표는 “몇 달씩 예약해서 찾아가는 외국의 ‘키친가든’ 같은 정원이 우리나라에도 이제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사진=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사진=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한국의 키친가든을 만들기 위해 정원 내 레스토랑을 만들고 매달 작은 공연을 열고 있다. 레스토랑은 슬로푸드를 지향한다. 식재료는 가능한 정원의 밭에서 수확한 유기농 야채를 사용하는 것이 원칙이다. 농촌진흥청의 도움을 받아 바질, 로메인 등 허브를 비롯해 호밀 등 다양한 농작물에 도전하고 있다. 부족한 것은 곽 대표가 시장에 가서 사온다. 고기도 서울 마장동으로 직접 걸음을 한다. 전화로 주문하는 것보다 고깃집 주인에게 아양도 떨면서 직접 눈으로 보고 사는 것이 훨씬 좋단다. 곽 대표는 “시장 사람들에게 배울 점이 많더라. 요즘 인생 공부를 많이 하고 있다”고 말했다. 레스토랑은 곽 대표와 같은 생각을 가진 젊은 셰프들이 맡고 있다.

갤러리는 전시 대관료 없이 작가들에게 무료로 빌려준다. 일반 갤러리의 경우 작품이 판매되면 작가와 갤러리가 일정 비율로 나누지만 이곳은 작가와 컬렉터가 직접 거래를 한다. 갤러리 몫을 뺀 만큼 작품 가격도 저렴하다. 작가는 전시를 할 수 있으니 좋고, 컬렉터는 좋은 가격에 작품 구입을, 정원에 온 손님들은 좋은 작품을 감상할 수 있으니 모두가 행복한 일이다. 곽 대표도 농사 짓다 피곤할 때 갤러리 가서 전시 중인 그림을 보면 행복하단다. 작가 선정은 봄 파머스가든의 상임 고문을 맡고 있는 정하경 한성대 명예교수가 하고 있다. 지난 3월 김강용 등 중견 작가 10명의 ‘200만원 소품’ 개관전을 시작으로 매달 새로운 작가 전시가 이어지고 있다. 내년 10월까지 작가 선정이 이미 끝났다고 한다.

매달 열리는 음악회는 서울대 김승근 교수(국악)의 자문을 받고 있다. 현악협주, 재즈연주회, 대금 등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는 중이다. 곽 대표는 “음악대학 출신들은 많은데 그들의 연주를 보려고 티켓을 사는 사람들은 많지 않더라. 젊은 연주자들에게 기회를 주고 싶다”고 말했다.

아직 수익이 나지는 않지만 곽 대표는 10년, 20년 후를 내다보고 천천히 가겠다고 했다. 수익은 입장료와 레스토랑 운영, 그리고 매달 식사와 공연(4만~5만원 선)을 묶은 작은 음악회에서 나오는데 직원들 월급 주기도 힘들다. 입장료는 성인 기준 7000원을 내면 음료까지 제공된다. 관람객은 주로 예약제로 받고 있다. 입장객이 많아지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이런 정원을 원하는 사람들이 계속 찾고 싶은 공간을 지키고 싶다. SBS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의 장태유 감독이 이곳에서 촬영을 하고 싶다고 제의를 해왔는데 거절했다. 곽 대표는 “솔직히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안 하길 잘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못 이기는 척 촬영을 허락했다면 지금쯤 중국 관광객을 실은 버스들이 꼬리를 물고 들이닥쳤겠지만 곽 대표는 돈을 따라가는 정원을 만들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1년차 초보 농부는 “농사 짓는 게 쉽지 않더라. 1년 해보니 겨우 감이 잡힌다”면서 “평생 머리를 과도하게 썼다. 농사지어 보니 내 일당은 10만원도 비싸더라. 그동안 삼성에서 너무 많이 받았다. 이건희 회장이 나한테 속은 것이다”고 말하며 웃었다.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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