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뉘 집 왔시유?” 들깨 농사를 지으러 네 바퀴 오토바이를 타고 밭에 나가는 중이라던 80대 할머니. 때마침 이곳을 찾아온 낯선 외지인에게 동네 사정을 다 안다는 듯 진한 충청도 사투리로 물어왔다. 30여 가구가 드문드문 숲 속에 박혀 낮잠에 빠진 이곳을 깨우려는 듯 불현듯 수탉의 홰치는 소리, 염소 울음소리가 산들바람에 묻어온다.
충남 공주시 정안면 쌍달리. 서울시 중심에서 약 120㎞ 떨어진 이곳은 공주시내에서 차로 불과 20분 거리지만 마을 어귀에 들어서면 시간이 멈춰선 듯 조용하고 평화로운 모습이 펼쳐진다. 대로인 차령로에서 쌍달리 간판을 따라 들어서면 나타나는 2㎞의 좁은 샛길에는 천하대장군 장승 군락과 성황당, 효자비가 눈길을 끈다. 마치 오랜 과거의 시간들이 살아 숨쉬는 듯하다. 장정 세 사람이 두 팔을 벌려 감싸안아도 모자란 허리를 가진 느티나무가 수백 년 지난 세월을 다 보아왔다는 듯 장중한 자태로 한낮 마을의 거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 산속에서 아내와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삶의 진정한 의미와 행복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됐어요. 앞뒤 돌볼 틈 없이 쫓기는 생활을 했던 지난 시간들을 다시 되풀이하지는 않을 겁니다.” 집주인 이준원(51) 씨가 옆에 앉은 아내 왕은성(50) 씨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며 다짐하듯 하는 말이다. 한낮의 쨍쨍한 햇볕 속에서 뻐꾸기소리가 울리는 산자락에 앉아 있는 부부의 모습은 더 없이 평온해 보였다.
아내 요양 도우려 시장직도 내던져
오랫동안 공주시내에서 아파트 생활을 하며 누구보다 바쁜 나날들을 보내온 그들이 이곳에 정착한 것은 1년여 전이었다. 늘 건강할 것 같던 아내가 2년 전 덜컥 위암 진단을 받은 것이 계기였다. 숲이 내뿜는 피톤치드가 녹아 있는 맑은 공기를 접하면 아내가 심신의 평화와 안정을 누릴 수 있으리란 기대 하나로 무작정 이곳 산속에 집을 지었다.
아내의 투병생활이 시작되자 이씨는 선출 공직자(공주시장)로서 아내를 늘 스트레스에 휩싸이게 했던 지난날들이 죄책감으로 몰려왔다. 이미 지난 8년간 두 번의 시장 임기를 잘 이끌었지만 차기 시장 선거를 1년여 앞둔 때인 2013년 봄에 그는 불출마를 선언했다. 보다 많은 시간을 아내를 위해 헌신하겠다는 다짐과 함께.
그리고는 산속에서 요양할 곳을 물색했다. 마침 공주 관내에 있는 무성산에 산행을 나섰다가 이곳이 풍수지리상으로도 좋고 상업용 축사가 없는 청정지역임을 알게 됐다. 산기슭에 다랑이 논이 있던 곳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곳에 집을 짓기로 결심하고, 평소 알고 지내던 건축가에게 내민 집 평면도에는 그가 평소 마음속에 간직해온 소망을 담았다.
우선 옛 한옥처럼 안주인이 사는 안채와 사랑채가 대청마루를 사이에 두고 격리되게 해달라는 것. 손님이 찾아와도 집 안채에선 아무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될 구조를 요구한 것이다. 또 자연의 맑은 바람과 공기가 집 안 곳곳 어디서든지 통할 수 있도록 공간이 겹치지 않고 펼쳐놓는 방식이 되게 해달라는 것, 가급적 콘크리트는 배제하고 친환경 소재인 나무와 흙, 돌을 사용해 마감해달라고 했다. 이에 더해 집 뒤뜰에 항암에 효험이 있다는 편백나무 숲을 작게나마 조성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해달라고 부탁했다.
장식 줄이고 자연과 조화 이룬 집
이미 고리 원자력발전소 본부사옥, 청운대 대학본부 및 도서관, 헤이리 촬영박물관 등을 설계해 이름이 알려진 중견 건축가 유현준(홍익대 교수) 씨는 처음에는 난색을 표했다. 유씨는 “마치 권총 같은 모습을 한 그 평면도를 보면서 건축가 입장에선 도저히 짓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풍수지리설을 굳게 믿으면서 아내의 건강을 염려하는 건축주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고 한다. 건축주인 이씨가 “이 땅에서 가장 좋은 기운을 전해 받을 수 있는 방법은 남서쪽에 자리한 두 산봉우리를 보는 것”이라며 구글(Google) 지도상의 정확한 앵글까지 지침으로 주더란다.
유씨는 결국 집주인이 그린 그 평면도를 기반으로 전체 건물 덩어리(매스)를 만들되 ‘땅에 떠 있는 듯한 모습의 집’을 만들어 평범함을 탈피할 수 있었다고 설명한다. 그는 “집은 가족이 서로의 프라이버시를 인정받으면서 조화롭게 어울리는 곳, 보호받고 행복을 느끼는 공간이 돼야 한다는 생각으로 집을 설계했다”고 덧붙였다.
집주인 이씨는 “안목이 높은 건축전문가가 자신의 뜻을 접고 문외한인 제 뜻을 따라줘 고맙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미안하게 여긴다”며 웃음을 지었다. 보전관리지역에 자리한 이씨네 집터(710㎡·215평)는 밖에서는 안이 잘 안보이고 안에서는 밖이 잘 보이는 형세를 하고 있다. 마치 산이 팔짱을 낀 듯 둘러쳐져 있는데 맑은 물이 양쪽으로 흘러 숲에 청량감을 더한다.
앞뒤 어디를 둘러봐도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이 집(건축면적 165㎡·50평)은 잡다한 장식은 사양하겠다는 듯 간결, 단순미가 돋보인다. 자연과 배치되지 않고 순순히 녹아 들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는 집이 최선이라는 집주인과 건축가의 뜻이 그대로 읽히는 듯하다.
집의 외관은 붉은 기운이 도는 삼나무로 둘렀고 내부는 보다 밝은 톤의 자작나무(합판)를 많이 사용했다. 집 한쪽은 푸른색 컬러 강판으로 이루어진 단순한 박공지붕(건물 모서리에 추녀가 없이 용마루까지 측면벽이 삼각형으로 된 지붕)을 도입했다. 또 다른 쪽은 서재만 다락방처럼 이층에 올려 집의 실루엣에 변화를 줬다.
주변 간섭 벗어나 고요하고 편안한 안방
기역(ㄱ)자형으로 늘어선 집은 가운데 앞뒤가 트였으면서 신발을 신고 들어서는 대청마루를 사이에 두고 왼쪽은 사랑채, 오른쪽은 안채가 자리 잡았다. 사랑채에 작은 방 하나, 안채에는 역시 작디작은 방 하나에 부엌, 그 안쪽으로 역시 침대 놓기가 어려울 정도의 자그마한 안방이 다소곳이 펼쳐져 있다. 안에 들어서자 편안한 정적이 감돌았다. 좁은 회랑같이 긴 입구통로에는 높은 창 대신 바닥쯤에 작은 슬릿창(좁고 긴 띠 창)을 내 직접적인 햇살을 물리치고 가라앉은 분위기를 연출했다. ‘내밀한 쉼터’로 이끄는 초입다웠다.
한옥처럼 서까래를 넣은 천장은 낮았다. 순간 들떠있던 뇌파가 진정되는 기분이 들었다. 거실 소파에 앉자 앞뒤로 굽이굽이 흘러가는 산자락이 한눈에 펼쳐졌다. 뒤꼍도 전망이 트여있어 꽃과 나무를 가꾼 뒷마당과 뒷산이 한눈에 들어왔다. 나무를 쪼개 이어 만든 천장은 낮았고 소파, 의자, 그림 등 집안의 가구들은 정결하고 단순해 군더더기가 없었다. 바닥에 놓인 헝겊 퀼트깔개가 편안함을 더해줬다. 역시 조촐한 크기의 거실 한켠에는 장작불을 지필 수 있는 난로를 설치해두었다.
집주인이 특별히 신경을 많이 쓴 안방에는 한옥 분위기가 느껴지는 툇마루 발코니를 앉히고 격자무늬 미닫이 문을 설치해 외부자연과 연계를 조절할 수 있도록 했다. 그 문을 열고 한단 높게 앉힌 실내 툇마루에서 책을 보거나 차를 마시면 자연을 깊숙이 끌어들일 수 있고 그 문을 닫으면 졸지에 작은 방은 고요한 정적에 놓이도록 했다.
안방은 흙으로 된 온돌구들에 불을 지필 수 있는 아궁이를 따로 두었다. 비가 오더라도 돌출된 툇마루 밑에서 아궁이에 장작불을 지필 수 있다. 안방에서 내려다볼 수 있는 별도의 작은 마당에는 손바닥만한 텃밭을 조성했고 제법 큰 매화나무가 아름다운 제 몸매를 뽐내고 있었다.
신발을 신고 드나드는 마루를 가운데 두고 안채와 격리된 사랑채는 작지만 앞에 큰 창을 내 바깥 풍경을 내다볼 수 있게 했다. 집 전체가 낮게 단층으로 배치됐지만 이층에는 작은 서재를 하나 앉혀 주택의 전체 실루엣에 돌출감이 주어졌다. 이층으로 올라가는 층계는 뒤편에 감춰져 있다. 의자에 앉아서도 자연에 시선을 둬 눈의 피로를 덜 수 있도록 눈높이에 길고 좁은 띠 모양의 슬릿 창을 배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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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씨 부부가 꼽는 이 집의 가장 큰 자랑거리는 거실 전면창 바로 앞마당에 있는 연못이다. 검은색 조약돌로 사방을 두른 직사각형 연못 물위에 집의 아름다운 전경과 파란 하늘에 흘러가는 구름, 굽이치는 산야가 비쳐 한 폭의 움직이는 동양화를 연출한다.
어둠이 잦아들면 집안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과 달빛에 젖은 연못이 사뭇 다른 그림을 연출한다.
또 일부를 나무 데크로 처리한 앞마당 곳곳에는 직사각형 돌확처럼 물을 담을 수 있는 공간을 뚫어 놓아 그곳에 부들 등 수생식물이 자라도록 했다. 물은 이 집 마당을 거쳐 흐르는 냇물을 끌어들여 늘 맑은 상태를 유지한다.
‘사슴 노니는 물가와 산속’에 자리 잡은 집
마당 곳곳에 나무 데크와 잔디밭을 조화롭게 배치해 운치를 살렸다. 마당 한쪽 끝에 놓인 항아리에서는 햇볕과 바람에 된장과 고추장이 잘 익어가고 있었다. 집 정면 한켠에 써서 붙여놓은 ‘녹천산방’은 이씨가 유년시절을 보낸 공주 유구읍 녹천리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한다. ‘사슴이 노니는 물가와 산속에 자리한 집’이란 의미로 이 집의 분위기와 잘 맞아 떨어지는 것 같다.
집을 감싸고 있는 담장의 석재는 집을 지으면서 땅에서 파낸 돌을 이용했다. 이 담 높이는 까치발을 하면 밖에서 안을 들여다볼 수 있게 낮게 조성됐다. 마당 곳곳에 자리한 여러 모습의 자연석도 집터를 고르면서 파낸 것들이다. 돌 틈 사이에 분홍색 패랭이 등이 다소곳하게 피어 있다.
올곧은 대나무들이 군집해 있는 뒷마당에는 아내의 건강을 위해 약속대로 편백나무 숲을 조성해놓았다. 50여 그루를 심어 아내가 앉아서 쉬면서 숲의 정기를 흠뻑 마실 수 있게 했고 자갈과 마사토를 이용해 맨발로 걸으면서 땅의 기운을 느끼도록 배려했다. “아내가 어서 빨리 회복되도록 편백나무를 촘촘히 많이 심어놨어요. 좀 더 자라면 다시 옮겨 심어야 하는 걸 알지만요.” 지난달 시장직에서 퇴임한 뒤로 아내 가까이로 돌아와 기도하는 남편의 마음이 통해서인지 아내의 건강은 최근 하루가 다르게 나아지고 있다고 한다.
“내 인생에서 아내의 헌신 없이 무엇이 이루어질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내는 나를 지탱해준 사람이에요. 내가 늦게 서울에서 박사학위 공부를 다시 시작할 때 아내는 말없이 집안 살림을 책임져줬지요. 그 고마움을 어떻게 다 갚겠어요.” 아내에 대한 사랑을 전하는 그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아내 왕은성 씨는 평생을 약사로 살아오며 정치인 남편의 든든한 경제적 지원군이었고, 선거철에는 남편과 함께 숨가쁜 일정을 소화해낸 정치적 동반자이기도 했다. 왕씨는 “얼마 전 남편의 권고로 공주 시립합창단 오디션에 지원해 합격했어요. 이루지 못한 꿈을 뒤늦게나마 좇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정치 접고 아내 껴안은 남편의 ‘사랑家’
젊은 시절 성악가의 꿈을 꾸기도 했지만 경제적인 안정을 고려해 약사의 길을 택했던 왕씨는 합창단에서 소프라노 음역으로 노래한다. “요즘은 산중에 자리한 내 집에서 큰소리로 노래 연습을 할 수 있어 더없이 좋다”며 그는 행복한 웃음을 지었다. 남편은 아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어디서나 원 없이 들을 수 있도록 집안 곳곳에 오디오를 설치해놓기도 했다.
공주 출신인 이씨는 2006년 시장이 되기 전까지 공주대학교에서 행정학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지난 6월 말 시장 임기를 마친 뒤로는 틈틈이 대학 강의를 통해 그동안 익힌 행정 경험을 젊은이들에게 전하고 있다. 대학 강의 말고는 대부분의 시간을 아내와 함께 보낸다.
“이전까지만 해도 제 시간의 10% 정도만 가정에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그런데 이제는 제 시간의 90%를 아내에게 쏟을 생각입니다. 시장출마를 일찌감치 포기한 것도 그래서입니다.“
이씨는 여가 시간을 이용해서 아내의 건강을 챙기기 위한 먹거리를 재배하는 데 땀방울을 쏟기도 한다. 집 뒤편에 지인이 놀리는 땅을 빌려 제 법 큰 텃밭을 일군다. 이씨 부부는 “함께 텃밭에서 미나리·고구마·상추 등 농사를 짓다 보면 세상사의 모든 시름과 번뇌가 사라지는 걸 느낀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농사일에 흥미를 느꼈는지 그들은 조만간 동네 어르신들로부터 종균을 받아 버섯농사도 지어볼 작정이라고 한다.
주말에는 조용한 산속 집에 활기와 웃음이 넘친다. 공주시내에 살면서 학교에 다니고 있는 세 아이들이 몰려와 가족의 소중함과 행복감을 선사해주기 때문이다. 이씨는 새로운 집에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은 듯 이렇게 말했다. “자연 속에 있노라면 조금씩 스스로 깨우치게 됩니다. 겸허해지고 순수해지고 솔직해지는 것 같아요. 이제 자유로운 삶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웃들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습니다.”
부부의 사랑이 지어낸 ‘녹천산방’의 대문은 항상 열려 있다. “남은 시간들을 이웃과 막힘 없이 소통하며 살겠노라”며 자연 속에서 시작한 이들 부부는 제 2의 삶에 설렘과 행복이 가득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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