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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몽골 탐방기

by 달빛아래서 2006. 5. 16.
한강포럼에서 주관하는 몽골탐방단의 일원으로 승선을 하면서 평소 한번 가고 싶어했던 몽골의 대 초원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2006년 5월 4일부터 9일까지 5박 6일간 한몽교류진흥협회의 협조 하에 한강포럼 몽골탐방단 17명이 한때 세계 역사상 가장 강대하고 거대한 제국을 건설했던 칭기스칸(Chinggiskhan)의 후예들이 모여 살고 있는 나라, 몽골을 탐방하기 위하여 장도에 오른 것이다.

인천국제공항에서 3시간 30분을 비행하니 몽골의 수도 울란바타르(Ulaanbaatar)에 있는 칭기스칸공항에 도착한다는 기내 방송이 나온다.
시계를 맞추기 위하여 현지시간이 어떻게 되느냐고 스튜어디스에게 물으니 몽골은 한국과 같은 시간대이기 때문에 시간을 조정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이 말을 들으면서 생각보다 몽골이 가까운 나라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끼게 한다.

칭기스칸공항에 내리니 사람들의 외모나 얼굴모양이 전혀 이국적인 느낌을 주지 않고 한국의 어느 국내공항에 내린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가까운 일본이나 중국만 하더라도 느낌이 다르게 다가오는데 몽골사람들은 가까운 친척을 만난 것 같은 친근감과 동질성을 느끼게 한다.
몽골반점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인지 몰라도 몽골사람들도 우리를 보는 느낌이 이국적이지 않다고 하면서 소박하고 친절하며 따뜻한 정을 우리들에게 보여준다.

몽골사람들로부터 칭기스칸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이 대단한 것을 첫눈에 느끼게 된다.
칭기스칸이 나라를 세운 1206년을 원년으로 하여 건국 800주년 기념행사가 몽골 곳곳에서 열리고 있으며, 공항청사 벽에는 칭기스칸 시대 즉 원나라 황제들의 대형 초상화가 걸려있고 호텔, 술, 도로, 건물 등에도 칭기스칸이라는 명칭을 쓰고 있다.
13세기 초 몽골 초원에서 흩어져 살던 부족들을 통합시킨 칭기스칸이 중국을 점령하여 원(元)나라를 세운 후 동쪽으로는 한반도, 서쪽으로는 헝거리까지 인류역사상 가장 거대한 제국을 건설하여 세계를 주름잡았던 향수와 긍지감을 몽골인들은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공항에서 호텔로 가는 버스 안에서 전에는 몽고라고 하였는데 요즈음은 왜 몽골이라고 부르는가를 물어보았다.
가이드가 대답하기를 중국에서는 몽고라고 하고, 서구에서는 Mongolia라고 하지만 몽골어로는 몽골(Mongol)이라고 발음하기 때문에 원음을 그대로 호칭하는 원칙에 따라 몽골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중국에서 부르는 몽고(蒙古)라고 하는 것은 몽매하고 후진성을 벗어나지 못한 종족이라는 뜻으로 오래 동안 몽골 족의 침략에 시달려온 중국인들이 몽골을 낮춰 부르기 위해 사용한대서 비롯됐기 때문에 몽고라고 부르는 것을 몽골사람들은 대단히 싫어한다고 한다.

우리 일행이 묵은 호텔은 몽골에서 가장 큰 칭기스칸호텔로서 마침 국빈으로 몽골을 방문하는 노무현대통령을 맞이하느라고 직원들의 발걸음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북한과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사회주의 체제 하에서 경제성장이 이루어지지 못한 몽골은 국민소득이 520달러에 불과한 후진국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성장경험과 기술 및 자본이 필요한 몽골로서는 한국대통령의 방문을 국가적인 큰 행사로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일행이 묵은 호텔


몽골의 수도 울란바타르에는 전체인구 280만의 25%인 70만 명이 몰려 살고 있다.
시내에는 몽골의 전통가옥 겔(천막)대신에 아파트가 많이 들어서고 있으며, 거리에는 한국에서 수입된 중고 자동차가 홍수를 이루고 있다.
경찰은 노무현대통령을 경호하는데 모두 동원되어 국빈 통로를 통제하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는 교통이 지옥과 같은 상황이지만 시민들은 아무 불평 없이 잘 참고 있다.
우리 일행도 국빈방문 교통통제 덕분에 일정에 차질을 주었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겔과 장승


계획된 일정보다 늦은 시간이지만 몽골 역사박물관에 도착했다.
건물은 낡았지만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주옥 같은 유목민 생활상, 종교, 예술 등의 자료가 잘 정리되어 있다.
몽골은 13세기 초 칭기스칸에 의하여 초원에 흩어져 있던 부족을 통합한 후 세계를 정복하는 대 제국을 건설하였지만 몰골이 세운 원나라가 패망한 이래 청나라의 교묘한 몽골 분열정책에 따라 내몽골과 외몽골로 나누어지게 된다.
1911년 청왕조가 멸망하게 되자 외몽골은 독립을 선언하지만 중국의 견제를 받아오다가 1921년 소련의 지원을 받아 외몽골은 완전독립을 하면서 소련의 영향하에 사회주의체제로 출범을 하게 된다.

그러나 1990년 초, 소련 공산주의의 몰락과 더불어 몽골도 사회주의 체제가 무너지면서 국호를 몽골인민공화국(Mongolian People’s Republic)에서 몽골 공화국(Republic of Mongolia)으로 바꾸고 국가체제도 민주주의로 전환하면서 인간의 기본권리와 개인의 자유뿐 아니라 종교의 자유를 완전히 보장하고 있다.
한편 내몽골은 계속 중국의 통치 하에 있으면서 중국의 한 자치구로 설정되어 있다. 중국에 의한 내몽골의 중국화 정책에 따라 한족의 이주가 급증하면서 현재는 한족이 90%를 차지하고 있으며, 몽골족은 소수민족으로 전락하고 내몽골자치구는 완전 중국화 되어가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몽골이라고 하는 것은 내몽골을 제외한 외몽골을 말하는 것이다.

테를지에서 일행 기념촬영


몽골여행 중에 몽골 최대의 휴양지 테를지(Terelj)를 빠뜨릴 수 없다. 테를지는 바위산이 바람과 비에 침식되어 형성된 높은 암벽과 물이 흐르는 계곡과 푸른 초원이 어울려 아름다운 풍경을 이루고 있다.
이곳에서 온갖 야생화가 만발한 푸른 초원, 소나무가 우거진 산과 그 뒤쪽으로 얼굴을 내민 바위산, 숲으로 우거진 뚝 사이로 흐르는 맑은 냇물, 초원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하얀 겔(천막), 한가롭게 풀을 뜯어 먹고 있는 소, 양, 염소떼 그리고 전통의상을 입은 유목민들을 만날 수 있다.

말타는 몽골 소녀들


우리가 테를지에 도착하니 몽골의상을 한 유목민이 잘 조련된 말과 함께 대기하고 있다. 말을 30분간 타는데 1$(US)이며, 한국 돈으로 1,000원을 주어도 받는다.
말을 처음 타는 사람은 마부가 말고삐를 잡아서 친절하게 도와주기 때문에 이곳에서 별 어려움 없이 승마경험을 할 수 있다.
몽골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말을 타면서 자란다. 어린 여자아이 두 명이 푸른 초원에서 먼지를 일으키며 신나게 달리는 장면을 보면서 우리 일행은 감탄의 박수를 보낸다.

보드칸에서 박일휴 대표와 차기문


몽골사람들의 절반이상이 살고 있는 겔(Ger)을 빼고는 몽골 이야기를 할 수 없다.
유목민의 가옥인 겔은 하얀색의 둥근 천막으로 3시간 정도면 설치하거나 철거할 수 있으며, 바퀴가 여러 개 달려 있어 보다 쉽게 이동할 수 있는 고급형도 있다.
도시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도 여름에는 초원에 설치된 전기, 수도, 전화, 텔레비전도 없지만 겔에서 지나기를 원한다. 겔의 문은 반드시 남쪽으로 향하게 되어 있으며 안에는 중앙에 난로가 있고, 난로를 기준으로 남성구역, 여성구역, 신성구역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남성구역은 문으로 들어가서 서쪽에 있으며 이곳에 말 안장, 고삐 등을 보관한다. 여성구역은 동쪽으로 부엌세간 살이, 아이들의 물건 등을 보관한다.
겔 안 북쪽 벽은 신성구역으로 부처님의 화상, 무기, 귀중품 상자 등 주인이 아끼는 물건을 보관한다.
이러한 겔에서 양고기로 만든 몽골의 전통음식에다가 보드카 칭기스칸과 마유주(馬乳酒) 등을 마시면서 유목문화의 진수를 맛볼 수 있다.

광활한 초원을 지나면서 성황당, 장승 등 우리나라와 유사한 몽골의 풍습을 보게 된다.
이러한 풍습은 고려시대 우리 여성들이 공녀(貢女)로 뽑혀 몽골로 보내졌던 것에서 기인하지 않았나 하고 생각된다.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는 한국과 몽골의 유사한 생활풍습이나 민속을 살펴보면 성황당, 돌하르방, 장승, 공기놀이, 굴렁쇠 굴리기, 가위 바위 보, 씨름, 신선로, 귀신에 먼저 음식을 바치는 고수레, 신방 엿보기, 신랑 다루기, 신부의 두 볼에 찍는 연지 등을 들 수 있다.

우리 풍습과 유사한 성황당


고려시대에는 우리나라가 6차에 걸쳐 몽골군의 침입을 받으면서 공물(貢物)과 공녀(貢女)까지 바치기 까지 하였지만 현재는 몽골이 우리의 도움을 간절히 바라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써 감회가 새로웠다.
우리 일행이 엥흐바야르(Nambaryn Enkhbayr) 몽골 대통령을 집무실에서 만났는데 몽골은 1인당 국민소득이 한국의 1/30에 불과하기 때문에 몽골인의 한국근로진출과 인력 교육에 대한 지원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
특히 한국의 새마을 운동을 몽골의 근대화 모델로 삼고 있다고 하면서 한국과의 더 많은 교류와 협조를 당부한다.
실제로 몽골인구의 1%인 28,000 여명이 한국에서 근로자로 체류하면서 몽골 외화수입의 절반이상, 국내총생산(GDP)의 10%를 본국으로 송금하고 있는 것만 보아도 국가 리더십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실감하게 한다.

좌에서 김용원 조선일보 편집국장, 몽골 대통령, 금진호 전장관, 임영자 한몽교류협회장, 차기문


냉전시대에 사회주의 체제를 따랐던 몽골이 탈냉전 후 민주화되면서 북한보다는 남한과의 교류가 훨씬 많아지고 있다.
울란바타르 시내에는 미장원, 음식점, 사우나, 각종상점 등 한국간판이 줄비하게 늘어서 있고, 영어는 몰라도 한국말을 하는 몽골사람들을 더 많이 만날 수 있으며, 거리에는 한국산 자동차로 물결을 이루고 있다.
한국과 몽골간의 교류가 얼마나 되는가는 인천국제공항에서 몽골 칭기스칸공항 간에 대한항공이 주 20회 운항을 하는데도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효자노선이 되고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울란바타르 시내에 30여 개의 한국식당 가운데 북한식당이 하나 있다.
줄곧 한국식당을 이용하다가 마지막 날 저녁에는 북한식당을 한번 이용하는 기회가 있었다.
“평양 모란식당”이라는 한글 간판이 쓰진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평양에서 파견된 검은 치마 흰 저고리를 입은 4~5명의 종업원 아가씨들이 친절하게 맞이한다.
우리가 찾아온다는 연락을 미리 받고 식탁에는 쇠고기 복음, 버섯요리, 김치찌개, 생채, 콩나물 등으로 깔끔하게 차려놓고 백두산 들죽술이 식탁마다 한 병씩 놓여 있다.
나중에 비빔냉면으로 서비스를 한 후 여자 종업원들이 마이크를 잡더니 노래방 반주에 맞추어 “반갑습니다” “휘바람” “다시 또 만나요” 등 많이 들어본 북한노래를 메들리로 부르면서 분위기를 돋군다.
종업원들이 부르는 노래가사 배경화면에는 태극기가 휘날리는 장면이 나오길래 나중에 확인해 보니 노래 반주기가 한국에서 제작한 “금영” 제품이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하지만 내심으로는 한국을 부러워하는 눈치를 이들로부터 느끼면서 서울로 향한다.

몰골은 한반도의 7배나 되는 광활한 초원에 인구는 대구 정도 되는 280만 명에 불과하기 때문에 무한한 잠재력이 있는 나라이다.

특히 풍부한 에너지와 광물자원 그리고 넓은 초원지대를 개발하는데 우리의 기술과 자본을 투여할 만한 약속의 땅이라고 본다.

출처 : 뉴라이트분당연합
글쓴이 : 분당거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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