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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과 사람

들꽃에 미쳐 "종자대왕" 영주출신 장형태

by 달빛아래서 2010. 6. 6.
문화
종합

[Why] 외고집 - 들꽃에 미쳐 30년 '종자 대왕' 장형태

입력 : 2010.06.05 03:06 / 수정 : 2010.06.06 10:38

구례 땅에 반해버린 묘목업자의 아들
'이름없는 들꽃'들을 농장에 모셨는데… 그렇게 수집하고 연구한 꽃이 700종
그가 이름을 붙여주자 들풀은 그에게 와서 꽃이 되었다
2002년 서울에서부터 하나하나 생겨난 도심 '야생화 정원'엔 그의 땀방울이…

장형태(張亨泰·56)는 농부다. 잡초 취급받던 우리 들꽃에 미쳐 하늘이 가르쳐준 대로 꽃 기르고 씨앗 내는 법을 깨쳤다. 온몸으로 배운 천기(天機)를 모든 이에게 누설하며 그는 명장(名匠)이 됐다. 2002년이다.

장형태는 3년 넘게 노동부가 매달 선정하는 기능한국인 39명 중 유일한 농부다. 그가 말했다. "농업은 애시당초 기술이다. 쌀 미(米)자를 보라. 얼마나 많은 기술이 필요하면 여든여덟 번 손이 가야 쌀 한톨이 나온다고 하겠는가."

들판이 좋아서 구례로 갔다

아버지는 묘목업자였다. 경북 영주에서 사과랑 배, 복숭아 묘목을 길러 농가에 팔았다. 사업이 번창했던지라 전북 전주에도 농장을 차리고 전국적으로 묘목을 판매했다. 장형태는 그 아버지를 보고 자랐다.

행동보다 입이 먼저인 자들을 제외하고 사명감은 함부로 생기지 않는다. 장형태는 입보다는 행동이 먼저였다. 훗날 가지게 된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 내지는 농업부국(農業富國) 같은 큰 뜻은 전혀 없었다. 고향 영주전문대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1975년 육군으로 입대해 광주 상무대에 배치될 때까지는.

"헌병으로 근무했는데, 출장이 잦았다. 그때 구례라는 곳을 처음 가봤다. 와, 산 많은 경상도에 비해 어찌나 들판이 넓은지!"

그 광활하고 기후 좋은 땅에 빠져 이 묘목업자의 아들은 1978년 제대하자마자 구례에 땅 1000평을 사 묘목을 길렀다. 대한종묘원이다. 훗날 "알고 보니 내가 본 들판이 구례에 있는 들판의 전부였더라"고 자백했지만 장형태는 구례 땅에 완전히 매료됐다.

그가 말했다. "고향에서 시작했으면 편했겠지. 하지만 선조 대대로 살아온 땅에서는 그 틀을 깨뜨리기가 굉장히 어렵다. 객지(客地)는 틀 자체가 없으니까 내 맘대로 할 수 있다. 알력? 당연히 있었다. 하지만 어디서나 다 있는 그런 알력이지 다른 건 없었다."

장형태가 구례 종묘원에 있는 흰줄무늬큰갈대밭에 서 있다. 가르쳐준 사람 하나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그가 연구해 성공한 갈대 재배다. 아무도 돌보지 않은 들풀들이 그에게 와서 꽃이 되었다. / 구례=김영근 기자 kyg21@chosun.com
키위 묘목을 키웠다

지리산은 가슴이 넓다. 사투리 다르고 산과 무관한 일을 하려는 20대 젊은이는 지리산 생활에 쉽게 적응했다. 적응하다 못해 장형태는 산으로 산으로 포섭되어갔다.

"논농사만으로는 절대 미래가 없더라. 힘만 죽어라고 들어가고 소출이 없으니, 돈 되는 작물을 길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첫 번째 작품이 양다래, 그러니까 키위 묘목이다. 1979년 뉴질랜드 특산인 키위가 대인기를 끌 때였다. 키위는 뉴질랜드 농가가 독점 생산하는 뉴질랜드 특산물이다. 묘목 한 뿌리가 그때 돈으로 6000원 나갔다.

장형태는 한국 토종인 양다래(키위와 그 근원이 같은 식물이다)를 개량해 키위 종묘를 만들어 시장에 내놨다. 판매가는 3500원. 절반 가격에 생존율이 훨씬 높은 이 묘목은 큰 인기를 끌었다.

신이 난 장형태는 이후 10년 동안 각종 묘목을 개발해나갔다. 그런데 "묘목은 10년 지나야 결과가 나오는 불안정한 상품"이라는 결론이 나오더라는 것이다. 어렵게 개발해도 소비자들 입맛이 변해버리면 몇억원어치 묘목도 불쏘시개감으로 생을 마쳐야 하니 그때의 억울함과 비통함이란!

장형태의 손에 황기 씨앗이 놓였다. 하얀 꽃이 지면 그 뿌리는 약으로 쓴다.
애기똥풀을 키웠다

농부가 땅으로 회귀(回歸)했다. 지리산이다. 그가 말했다. "내겐 식물 수집벽(癖)이 있었다. 구례에 정착한 이래 늘 등산을 다녔는데, 등산로에서 들꽃이 보이면 그걸 흙째 채집해 농장에 길렀다."

얼레지, 매발톱, 며느리밑싸개, 애기똥풀, 명아주 기타 등등 지리산자락에 피어나는 들꽃은, 그 당시에는 '이름 없는 들꽃'으로 치부되던 그렇고 그런 잡초들이었다. 특이하게 보이는 야생초들은 어김없이 농장으로 모셔왔다.

모셔온 들풀들은 박제되어 공책 틈으로 가는 대신에 농장 한쪽에 마련된 온실 화분에 뿌리를 내렸다. 장형태가 말했다. "채종(採種)을 하면 본질적인 지식을 얻게 된다. 풀이 사는 곳의 태양, 기후, 바람, 습도, 뿌리 상태, 뿌리가 내린 땅의 토질 그런 요소들을 내 눈과 손으로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꽃은 소우주(小宇宙)였다. 그 오묘한 세계에 점점 더 빠져들었다."

기화묘초(奇花妙草)가 난난무무하는 세상에서 이름 없는 들풀에 대한 참고서적은 전무했다. 장형태는 그렇게 산에서 채집한 들꽃에 일일이 각주와 미주를 달아 기록을 한 뒤 사진을 찍고 구례 농장에 그 환경을 그대로 재현해 들꽃들을 이주시켰다.

죽은 꽃들보다 살아난 꽃들이 훨씬 많았다. 훗날 헤아려보니 구례 생활 10년 동안 수집한 우리꽃들이 700종이 넘었다. 700종에 대한 자료는 문을 제외한 구례사무실 세 벽면을 가득 채웠다.

매출 100만원을 올렸다

묘목을 포기한 장형태가 말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도시 가로를 채운 조경화들은 다 서양 종자들이었다. 팬지, 메리골드, 사루비아(샐비어) 기타 등등 일년초들을 심어서 다음해에는 또 종자들을 수입해서 심었다. 이게 말이나 될 소리인가. 그래서 우리꽃으로 도시를 조경하면 여러 가지로 좋겠다고 생각했다. 막말로 나는 우리꽃에 대해 당시에는 최고였으니까 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약간은 무모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굉장히 무모한 짓이었다. 그 누구가 잡초를 돈 주고 사서 도시 미관을 해치려 들겠는가! 더군다나 산에서 불법채취해 증식한 잡초를. 지리산자생식물연구원을 만들고, 야생화 종자와 종묘를 처음 출하한 1995년도 매출은 100만원을 겨우 넘었다. 아무도 사지 않았다. 전직 묘목업자요 자칭 야생화 전문가는 돈을 까먹어나갔다.

1 금낭화. 2 노란붓꽃. 3 애기달맞이꽃. 4 패랭이꽃.
야생화 문화를 키웠다

그가 말했다. "섬진강변에 심은 매화나무 대부분이 우리 종묘원에서 생산한 묘목들이다. 경남 하동이 원래 매실산지였는데, 지금은 강 건너 전남 광양이 주산지다. 왜? 거기 청매실농원 여주인 홍쌍리가 '돈'이 아니라 '문화'를 만들었기 때문 아닌가. 땀냄새 분분한 사람의 문화가 있기 때문에 매실 하면 광양이고 매화 하면 광양이 되었다. 하동은 그 문화를 외면하고 돈만 생각하다 좌절한 케이스고."

농부 아닌 기업인 장형태가 덧붙였다. "시장이 없으면 만들면 된다. 시장에 끌려가서는 절대로 성공 못 한다." 농부는 야생화 문화 전파에 운명을 걸었다. 자생화동호인을 모아 연구회를 만들었다. 관공서랑 기업, 학교를 찾아다니며 우리꽃을 알렸다. 키 낮은 들풀을 지칭하는 '지피식물 가이드북'을 만들어 펴냈다. 이 책은 지금도 한국 자생식물학계의 교본으로 꼽힌다.

1995년 구례 농장에 7000평짜리 야생화 육묘장을 만들었다. 할미꽃, 구절초, 꽃향유 등 들에서밖에 볼 수 없었던 우리꽃들이 30만 송이나 피어났다. 광주비엔날레, 광주 중외공원에 그냥 꽃들을 보내 심었다.

관광지, 심지어 명산 대찰(大刹) 앞마당까지 점령한 외래종을 거둬들이고 거기 야생화를 보냈다. 논 뒤집어엎으려는 농민들에게 "논을 놀리느니 식물을 심어 지력(地力)을 보존하시라"며 종자 나눠주고 야생화 생산에 끌어들였다.

정부를 규탄했다

"들어간 돈? 생각하지 않는다. 농업이 어디 자고 일어나면 바뀌어 있는 IT산업인가? 길게 봐야지, 길게. 하는 놈이나 정부나."

옛날을 회상하던 장형태가 느닷없이 정부 규탄 모드로 전환했다. "국가 농업연구소들이 성과가 없다고 다 없앤단다. 말이 되나. 한 달 주고 일년 주고 종자를 개발하라고? 그러니 우리 농업이 이 모양으로 결딴났지."

잠시 2010년으로 돌아와 명장과 기능한국인이 된 농부 장형태의 말을 들어본다. "한식 세계화? 웃긴다. 김치 만드는 고추, 배추, 무 이거 몽땅 종자는 외국 종묘회사가 가지고 있다. 농업 헌신짝으로 여길 때 한국 종묘회사들이 허덕대다가 다 팔아버린 거지. 한국 인건비 비싸니까 중국에서 기른 종자 들여와 개수까지 세며 파는 고추 배추 무 씨앗으로 김치 만드는 나라가 돼 버렸다. 그래서 지금 한국종묘라고, 안 팔린 회사가 하나 남아 있는데 그 회사는 '민족종묘'라고 자위하며 버티고 산다."

월드컵, 그리고 성공

불만과 규탄의 씨앗은 이미 젊을 적에 파종됐다. 젊은 장형태는 불만을 생산적으로 풀어나갔다. 금낭화, 붓꽃, 구절초, 범부채 따위 야생화들이 지자체 지원 연구비로 대량생산이 이뤄졌다.

중국 약초 도감인 본초강목(本草綱目)이 유일한 식물분류학 문헌인 이 척박한 야생의 세계에서 장형태는 걸어다니는 야생화 도감으로 성장했다. "내가 배워야 할 지식은 100% 땅이 가르쳐줬다"는 말이 허언(虛言) 같지 않다.

마침내 2002년 "빵 터졌다". 2002년 월드컵 때 서울시가 전역을 야생화로 꾸미기로 한 것이다. 이름 없는 들풀이 그제야 이름을 갖고 그제야 이름을 불러준 그에게로 가서 꽃이 된 것이다.

이후 전국 각지 도시들이 서울을 벤치마킹해 장형태를 찾았다. 야생화에 관한 노하우와 대량생산 능력을 가진 종묘장이는 오로지 장형태밖에 없었고, 지금도 없다. 대한민국 땅에서 인공으로 조성된 야생화 정원은 장형태표 종자라고 보면 대충 옳다.

어깨를 짓누르는 사명감

100만원 갓 넘던 매출은 14년 만에 2009년 25억원으로 2500배 뛰었다. "구례가 아니라 도시 근교에 땅을 샀다면 돈은 더 벌었을지 모르겠지만, 돈도 벌고 사람 살기 좋은 세상 만드는 일은 못 했겠지"라고 했다.

틀림없이 개발 붐 타고 땅 팔아서 거부(巨富)가 되어 떵떵거리며 남몰라라 살고 있을 거라고 했다. 수집벽이 잉태한 일이 어느덧 사명감 가득한 사업으로 변해 어깨를 짓누른다.

그래서 토종식물이 외국 재산으로 등록되기 전에 국가 주도로 뭔가 대책을 내야 한다고 소리치고, 돈 좀 생기면 종자은행(Seed Bank) 만들어서 종자 전쟁에서 승리하겠노라 작전을 짠다.

"4대강 사업 다 좋은데, 왜 생태 전문가들 미리 참여 안 시켜서 희귀종 대책 없이 말썽을 피우냐"고 힐난도 한다. 온 세계 돌아다니면서 문익점처럼 지갑에 넣고 들어와 품종 개량 중인 외국 종자도 수천 종이다. "토종과 교배해서 새 품종 나오면 그건 대한민국 재산"이라고 자신만만이다.

나이 47세 되던 2001년 장형태는 호남대 환경원예학과에 입학했다. 지금은 단국대 환경조경학 박사과정에 있다. 2녀1남 가운데 아들 승일(28)은 아버지로부터 모진 기합 받아가며 구례 농장에서 일하고 있다.

아버지는 "대를 잇겠다고 한 건 그 친구지 내가 강요한 적은 절대로 없다"고 강변했다. "보아하니 나보다 훨씬 나은 놈이 될 거 같다"는 팔불출(八不出)적인 자랑도 빼놓지 않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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