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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력 : 2010.08.28 03:19 / 수정 : 2010.08.28 08:30
한윤수 화성외국인노동자센터 소장
"한국 온 외국인 대다수는 희망대로 꿈 이루고 귀국…사장들 중에 5%만 악성"
"노동자 손가락 다쳐 가봤더니 더 불쌍한 사장이 달려나와…없어서 못주는 건 보면 알아요"
어떤 이들은 그에게 "뒤통수 조심해라", "밤길 조심해라" 하고 협박한다. 그러나 이 남자, 끄떡없다. "지난 3년여간 단 한 건도 못 받은 게 없다. 나는 떼인 돈은 어떻게든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 받아내는 악질 목사다."경기도 화성시 발안삼거리에 있는 화성외국인노동자센터 한윤수(62) 소장이다.
외국인 노동자가 가장 많은 도시는 안산이지만, 거기엔 중국 동포가 절반이 넘는다. 반면 화성에는 순수 외국인 노동자가 약 2만5000명. 단일 도시로 가장 많다. 이 도시 인구의 5%, 스무 명 중 한명이 외국인 노동자다. 공장은 영세하고, 일은 힘들며, 사고가 빈발한다. 그러니 싸움도 잦고 억울한 사람도 많다. 이때 노동자 쪽 '해결사'로 나서는 사람이 바로 한윤수 소장이다.
한윤수는 운동권이 사랑했던 출판사 '청년사'를 세운 사람이다. 1970~80년대, 대학생들이 '노동야학'으로 달려간 데는 라틴아메리카의 빈민 르포 '산체스네 아이들', 멕시코 혁명가의 일대기 '판초 비야', 10대 노동자들의 현실을 기록한 '비바람 속에 피어난 꽃' 같은 책도 영향을 끼쳤다. 그 책이 청년사에서 나왔다. 그러나 "한두 개가 아니라 한 백 가지쯤" 되는 일이 없었던 이 출판사 사장은 수십억원의 빚을 지고 세상과 멀어졌다가, 다시 맨손으로 '30년 전 그 눈빛들' 속으로 들어왔다.
- ▲ 베트남·태국·캄보디아·인도네시아…. 우리나라에 돈 벌러 온 외국인 노동자의 나라들 국기다. 한윤수 화성 외국인노동자센터 소장이 센터가 입주한 건물 옥상에 서 웃고 있다. / 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외교관 꿈이었던 대학생, 운동권 출판사 차리다
―청주고,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한 분이 왜 고시를 안 보시고. 운동권이었나.
"운동권은 무슨. 굳이 나누자면 '독서권'이다. 영화 속 외교관들이 연미복 입고, 댄스 하는 게 멋있어 보여 외교학과에 들어갔다. 막상 입학했더니 '외교관 월급이 적어 품위 유지하려면 부잣집 여자와 결혼해야 한다'는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더라. 에잇, 잘못 들어왔다 싶더라. 유홍준(전 문화재청장)이랑 친해서 우리 가요를 연구하는 '가요반세기클럽'이란 걸 만들었다. 회원은 유홍준과 나, 둘뿐이었다. 그렇게 외교관과 멀어졌다. ROTC 마치고 73년 광명인쇄소에 취직했다."
―명문대 나와 웬 인쇄소인가.
"우리 때는 신문사·유공 아니고서는 별로 취직할 곳이 없었다. 공부를 안 해 좋은 곳 가기도 힘들었고. 광명인쇄소는 5·16 혁명공약, 새마을 잡지 같은 것을 찍은 최고의 인쇄소였다. 1년 후 거기보다 월급이 많은 주택공사 들어갔다가 2년 만에 또 나왔다. '욱'하는 성미라 조직생활을 잘 못한다. 76년 첫 책 '판초 비야'를 낸 후, '나의 사랑, 나의 신부'로 돈 좀 벌었는데, 80년 '비바람 속에 피어난 꽃'을 낸 후 경찰이 쫓아다녀 그 이후 책을 내지 못했다."
'비바람 속에 피어난 꽃'은 약 100곳의 야학에서 채집한 10대 노동자의 비참한 현실을 담아내 운동권의 필독서가 됐지만, 계엄령 하에 있던 당시 현실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책이었다.
―그럴 줄 몰랐나.
"왜 몰랐겠나. 주변에서 좀 말려줬으면 했는데, 아무도 안 말리더라. 우이동에 있는 집을 팔아 그 돈으로 2만부 찍어서 돌렸다."
―경찰에 수배당한 건가.
"정식 수배는 아니고, 경찰이 날 찾으러 다니기에 '찾김' 당하기 싫어 마포 친구 집에 몇 개월 숨어 있었다."
―노동자들은 이후 어떻게 됐나.
"내가 숨는 바람에 책 속에 나온 아이들도 별일 없었다. 책에는 익명으로 처리됐으니까. 그 친구들 여섯과 야학 선생이었던 두 사람, 여덟 명이 지난 5월 센터를 찾아왔다. 여태 노동자인 사람은 하나도 없고, 보석상·가정주부·보험설계사·마트 사장 등 다양하게 살더라. 노동자였던 애들이 선생들보다 경제적으로는 더 윤택하더라. 모여서는 '그때 그렇게 고생했어도 그때가 좋았다'고 얘기하더라."
국적 불문
"태국·베트남·필리핀·몽골…손잡고 업주 찾아갑니다"
성공률 100%
"물면 안 놓는 '악질 목사'…지난 1년간 임금·퇴직금3억7200만원 받아냈죠"
SINCE 2007
"출판사 '청년사' 차렸다가 빚 40억 지고 목사 수업…선교 중에 노동자들 만나"
수수료 '제로'
"동남아 여행 갔는데 그들이 손 흔들어주느냐 권총 쏘는 표시하느냐
그건 우리한테 달린거죠"
왜 사업마다 망할까, 가물치 양어장까지
84년 출판사를 닫고, 그는 경기 고양으로 들어가 농사를 짓다가 가물치 양어장까지 차렸고, 그 후 또다시 농업·출판사 등 여러 일을 했지만 다 망했다.
―어쩌다 가물치를 길렀나.
"누가 치어도 대주고, 크면 다 가져다 팔아주겠다고 해서 차렸다. 가물치는 수온이 20도 이상 되어야 푹푹 자라는데, 한강 이북에서는 그런 날이 며칠 안 된다. 3년쯤 하다가 접었다. 내가 남의 말을 잘 듣는다."
―그럼 그 이후에 뭘 하다가 신학대학에 들어간 건가.
"농사도 짓고, 출판사 또 하려다 IMF 때문에 또 망하고, 땅도 사고…. 하도 망해서 다 말하기도 그렇다. 이 나이에…."
―대체 빚이 얼마였기에.
"40억원쯤 됐다."
―사업체질 아닌 거 알면, 뭘 좀 그만 했어야지 않나?
"원래 남자란 족속이 잘 멈출 줄을 모른다."
―전과도 있나?
"그런 건 없다."
―돈 떼인 사람들이 소송 안 했나.
"다 친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런 일은 없었다."
―빚 있으면 마음 무겁지 않은가. 갚기는 했나.
"무겁지만 어떻게 해. 다행히 고양에 있던 가물치 양어장 터가 삼송지구로 개발되는 바람에 원금은 다 갚았다. 그래도 그 사람들이 지금도 센터에 2만~3만원씩 기부해준다. 친구들과는 서서히 관계를 회복 중이다."
―2002년 장로회신학대학에 들어갔다. 사회참여 욕구와 오롯이 종교적 세계관을 받아들이는 일이 충돌하지 않았나.
"유아세례를 받긴 했지만, 신학교에 들어간 건 빚에 몰려서였다. 신학교는 군대 같아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도 많았다. 그러나 예수의 마지막 3년간의 행적, 거지·나환자·어부들을 살렸던 기억을 활성화하는 게 종교라면 나는 명백한 종교인이었다. 신학자 칼 바르트의 말이 있다. '한 손엔 신문, 한 손엔 성경'. 그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 말은 좋아한다. 종교가 개인 수양에만 집중하는 건 반대다."
―그런 태도로 신학교를 졸업하는 건 어렵지 않나.
"졸업 안 시킨다는 사람도 많았다. 저건 이단(異端)이 아니라 삼단, 사단 될 사람이라고."
―종교인이 사회참여에 무게를 둔다면, 종교 믿는 정치인과 뭐가 다른가.
"그런 어려운 건 잘 모르겠다. 단, 예수는 정치가 오래가지 못한다는 걸 알고 근본에 치중한 분이다."
- ▲ "현장을 떠나면 끝이야.”‘떼인 돈 받아내기 성공률 100%’한윤수 목사는 거듭‘현장’을 강조한다. 1000가지 상황이면 해결 방법도 1000가지. 그래서 관련 조항·법이 바뀌는 걸 예의 주시해야 하고 많은 성공 케이스를 꿰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 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불량 목사, 30년前 그 눈빛을 만나다
2007년 목사가 된 그는 안산에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30년 전 그 눈빛"들을 다시 만났다. '태베필인스캄'(태국 베트남 필리핀 인도네시아 스리랑카 캄보디아) 노동자들의 눈빛이 30년 전, 10대 노동자의 그 눈빛이었다. 2007년 6월 5일, 그는 화성시에 민간단체인 '외국인노동자센터'를 열었다. 그간 7000만원의 사재를 털어넣고, 7000건의 체불·산재사고 등을 처리했다.
―아예 정치판에 뛰어들어 입법단계부터 고치면 되지 않나.
"입법단계라. 말은 근사한데 실생활에선 적용이 안 된다. 실제로 내가 하는 일은 돈 받아주고, 직장 옮겨주고, 치료받게 해주는 일이다. 이런 일을 하는 정부 기관이나 단체도 여러 곳이다. 그런데 정작 그들 얘기를 수없이 들어주고, 그들 손 잡고 열번이고, 백번이고 업주 찾아가는 사람은 적다. 그럴듯하게 사진이나 찍는다고 일이 돌아가는 게 아니다."
―발로 직접 뛰다 보면 비현실적인 법률과 부딪치지 않나?
"그래서 공무원이 중요하다. 훌륭한 법 조항도 공무원 의지가 없으면 제대로 실행이 안 되고, 반대 경우도 많다. 우리처럼 밑바닥에서 일하는 사람하고 공무원하고 의견이 잘 맞으면, 법도 바꿀 수 있다."
―화성에 센터를 연 이유는 뭔가.
"전국의 외국인 노동자가 50만명이 넘지만 화성은 정말 열악했다. 재하도급·재재하도급 기업이 많아 여건이 열악하고 사건도 많지만, 도와줄 사람이 없었다. 오죽하면 외국인들이 보건소 간호사에게 돈 좀 받아달라고 달려갔겠나."
―떼인 돈 받아 주면 그들은 어떻게 감사를 표시하나.
"유교 전통이 있는 베트남인이나 고마움을 표시할 줄 안다. 유목민 출신인 몽골·우즈베키스탄·키르기스스탄 사람들은 고마운 것을 모른다. 양 한 마리 잃어버리면 온 마을 사람들이 찾아다니는 게 그네들 전통이니까. 충청도에서 달려와 무작정 '같이 가보자'고 조르는 식인데, 자기 회사 이름도, 전화번호도 모르는 사람이 있다."
―알아주지도 않는 일을 왜 해줘야 하나.
"작년에 3000건 정도를 처리했는데, 경우가 다 다르다. 그 차이를 알고 해결해 나가면 얼마나 재미있는데."
―고용주인 사장은 어떤 사람들인가.
"한국 사장들 90%는 좋은데, 10%가 문제다. 그 10% 중 절반은 얘기가 통하는데, 나머지 반은 악성이다. 노동감독관이 옆에 있는데도 '이눔의 새끼 눈깔을 확 뽑아버릴까'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은 한국인 직원한테도, 자기 부인한테도 못한다. 외국인 노동자 위해서 사장 부인이 진정서를 써준 경우도 있을 정도다. 몇몇 '악질 사건'이 잘 풀려 지금 화성에서는 퇴직금·월급 떼어먹고 노동자 때리면 다 걸린다는 생각이 많이 퍼졌다. 사건 하나 풀고 나면, 사장들 사이에 소문이 좍 퍼진다."
―하도급업체 사장이라도 중산층 정도 아닌가.
"그 이하도 많다. 일방적으로 노동자 편만 들 수는 없다. 그런 경우 깎아주고 봐준다. 노동자 하나가 손가락이 잘려 공장에 갔더니 사장이 점퍼 입고 나오는데, 다친 노동자보다 그 사람이 더 불쌍해 보이더라. 돈이 없는 사람과 있는데 안 주는 사람은 다르다. 딱 보면 보인다."
―외국인들한테 미안한 감정을 가져야 하나.
"그럴 필요 없다. 베트남 호아빈 근처 수력발전소에서 한국에 왔다 간 노동자를 만났더니 내가 안 보일 때까지 손을 흔들어 주더라. 우리를 거쳐 간 대다수 외국인이 우릴 고맙게 생각한다. 다들 꿈에 부풀어 한국에 오고, 상당수가 희망대로 된다. 10%, 5%의 사장이 문제일 뿐이다."
―결혼으로 국적을 취득한 외국인이 이혼 후, 고향 애인 데려다 한국서 산다는 얘기도 있다. 왜 우리가 이용만 당해야 하나 하는 주장이다.
"외국인 중에도 못되고 무책임한 녀석들이 있다. 그러나 그건 소수이고, 인간사의 죄악을 그들도 짓고 있는 것이다. 외국인이 들어오면 그런 일을 피할 수 없다. 애초에 우리가 필요해서 외국인 노동자 부른 거 아닌가. 독일에 터키인이 없으면, 프랑스도 알제리인이 없으면 3D 업종이 안 돌아간다.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 초, '외국인 불법체류자 제로로 만들겠다'고 했다가 '20만명 유지'라고 후퇴한 것은 현실논리 때문이다. 일본은 외국인 노동 정책을 잘못 운용해, 연착륙에 실패하지 않았나. 노동력 이동은 세계적 추세고, 우리에게도 그런 과거가 있다. 한 노동 감독관의 아버지도 미국서 불법체류자로 지내다 사망해서 고국에 돌아왔다."
―외국인 노동자 숫자가 늘어나면 사회불안세력이 된다고 우려하는 사람도 있다.
"서울서 노는 노동자 몇몇이 그렇지 이런 데 노동자는 정말 순박하다. 노동자 하나가 대개 일가친척 20명을 부양한다. 걔들에겐 고향, 가족 생각밖에 없다."
―외국인에 대한 우리의 법은 어느 수준인가.
"우리 고용허가제는 70점 정도, 괜찮은 수준이다. 다만 사장의 동의가 있어야만 노동자가 직장을 바꿀 수 있는 점이 가장 큰 문제다. 빚내서 브로커에게 1000만원씩 주고 한국에 오는 노동자 문제도 개선해야 한다. 상대방 나라가 싫어하겠지만 우리 외교력으로 압력을 넣어야 한다."
―그러면 고용 안정성이 흔들릴 것 아닌가.
"산재가 자주 발생하는 공장, 밥도 안주고 빵으로 때우는 공장, 컨테이너 반 칸에 네명씩 재우는 공장은 도태되어야 한다. 남북전쟁 시절 노예도 아니고 말이다."
―여성노동자들이 성희롱이나 추행을 당하는 경우도 많다는데.
"성희롱이 주로 기계 뒤편에서 이뤄지는데다 동료들이 눈치 보느라 증언을 꺼려 입증이 어렵다. 한국인 사장은 좀 덜 만지고, 과장급들이 심하게 만진다. 좀 모자란 놈들이 완장 차고 으스대는 거랑 같은 심리지. 경찰에 가서 해결한다."
외국인 노동자, 그들 역사가 이제 우리 역사
―기아차·삼성전자 같은 대기업 노조에서 센터 지원 좀 하나.
"없다. 신문에 사진 내려고 대기업 노조에서 한 번 찾아온 적은 있다."
―노동의 이름으로 하나 되는 거 아닌가.
"현실을 모르는 얘기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한테 관심이 없다. 외국인 노동자와 한국 노동자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외국인 보기에 한국인은 엄청난 권리다. 젊고 잘생긴 캄보디아 총각이 나이 많은 한국 여자랑 결혼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한국에서 '쯩(주민등록증)' 하나 얻으려고."
―시민단체가 필요하긴 하지만, 너무 권력의 맛에 빠진 것 아닌가 하는 우려도 있다. 그런 의심 받은 적 없나.
"그런 문제는 주로 큰 단체에서 발생하는 거 아닌가. 3년 전 혼자 센터를 시작했을 때, 내가 자리를 비우면 저 앞 장터에서 조개 파는 아줌마가 사무실을 지켜줬다. 돌아오면 조개 아줌마가 '필리핀 다섯명 왔다 갔어' 이런 얘길 해줬다. 이런 데 무슨 '권력'이 있나. 그래도 의심하면 그걸 어떻게 막겠나."
―해결 못한 사건, 마음에 남아 있는 거 있나.
"없다. 하지만 돈이 정말 없어서 못 주는 건 우리도 어떻게 처리할 수가 없다. 또 본인이 싫다는 경우도 있다. 태국인들은 이상하게 못 기다리고 그냥 돌아간 뒤에 가서 욕하는 경우가 있어 속이 터진다. 네 밥 좀 찾아 먹으라고 소리도 자주 지른다."
―노동자와 고용주, 양쪽의 주장이 대립하면 어떻게 진실을 알 수 있나.
"처음엔 나도 많이 속았다. 사장한테도, 노동자한테도. 요샌 양쪽 말 들어보면 답이 나온다. "
―개과천선한 사용자가 있나.
"그런 건 없다. 우리 사건 중 22%는 전화 통화로 해결된다. 67%는 노동부 대질조사 단계에서 끝나고, 나머지 11% 정도가 법원 가서 해결되는데, 이런 경우 형사처벌 직전이 되어야 사장이 돈을 내놓는다. 지난 1년간 노동자 임금·퇴직금 받아준 게 3억7200만원이다. 하루 100만원꼴이다."
―가장 오래 걸린 사건은 어떤 건가.
"2008년 7월 24일 시작해 지난 7월 27일, 2년 3일 만에 끝난 사건이 있다. 충북 옥천의 섬유공장에서 일한 베트남 노동자 퇴직금 사건인데, 715만원을 받아 법원에서 베트남에 있는 그 사람 통장으로 넣어줬다. 핏대 올릴 필요도 없다. 그저 세월아 네월아, 법원서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면 된다."
―떼인 돈 받아주면서 선교도 하나.
"안 한다. 그러면 '기브앤드테이크' 아닌가. 그 사람들이 많이 당해놔서 그런 의도가 있으면 금방 눈치 챈다. 요즘 외국인 중에는 '외국인 데려와 춤춰주고 노래해주고 사진거리 만들어줄 테니 몇백 달라' 이런 경우도 있다. 행사에 자꾸 동원하면서 외국인들을 버려 놓은 거다."
―마지막 질문이다. 왜 우리가 외국인 노동자의 조건을 개선해야 하나.
"경제적 이익? 먼저 그걸로 얘기해볼까. 국산 부품을 외국인이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제품이 또 외국으로 수출된다. 외국인 노동자 보내는 나라들로 말이다. 외국인 내보낸다고 한국인 일자리 늘어나는 게 아니잖은가. 이건 제로섬 게임이 아니다. 그리고 떳떳하면 좋지 않은가. 베트남 여행 가서 뒤통수 가려우면 되겠느냐고. 그곳 사람이 웃어주느냐, 권총 쏘는 표시하느냐 이건 우리한테 달린 거다. 우리 옆에 있는 불행한 사람을 두고도 우리가 행복할 수 있나. 이제 한국에서의 외국인의 역사는 바로 우리 역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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