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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덕의 新줌마병법]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by 달빛아래서 2012. 9. 15.

[김윤덕의 新줌마병법]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 김윤덕 기획취재부 차장
  • 입력 : 2012.09.03 23:30

    왜 그리 유별나게 사느냐고? 뻔뻔하고 탐욕스러우냐고?
    돈 벌어주는 남편 없으니 입에 단내 나도록 살지~
    그래도 괜찮아… 아이들이, 사랑이 있으니까

    김윤덕 기획취재부 차장
    퇴근길. 143번 버스 정류장에 여자가 서 있다. 휴대폰을 두 손으로 감싸쥐고 통화를 한다. "어머나, 세상에!" "아유, 그러믄요." 한껏 과장된 목소리에 비굴함이 묻어있다. 상대가 코앞에 있기라도 한 양 "고맙습니다~" "행복하세요~" 하며 허리를 꺾을 땐 영락없이 한 표(票)를 구걸하는 정치인이다. 허리를 굽힐 때마다 어깨에 멘 묵직한 가방이 그녀의 등을 타고 내려온다. '한 건(件) 했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힘차게 쓸어올리는 여자는 오른쪽 눈썹꼬리가 지워지긴 했어도, 물빛 블라우스의 겨드랑이가 땀에 흥건히 젖어 있긴 해도 예쁜 편이다.

    유명 백화점을 지나 남산 터널을 뚫고 한강 이남을 향해 달려가는 143번 버스는 언제나 만원이다. 10분 가까이 기다린 버스가 저만치 고개를 내밀자 사람들이 버스의 도착 지점을 향해 일제히 움직인다. 느긋하게 버스가 들어오길 기다리던 여자는 승객들이 북적이는 앞문 대신 뒷문을 선택한다. 하차하는 사람들을 뚫고 뒷문으로 재빨리 올라탄 여자는 마지막 남은 좌석에 엉덩이를 들이민 뒤 승리의 미소를 짓는다. 반백(半白)의 기사가 백미러에 대고 외친다. "아줌마, 뒷문으로 타면 위험합니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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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콩나물시루나 다름없는 버스는 터널 초입부터 거북이걸음이다. 갈 길이 멀다고 판단했는지, 여자는 자기 몸체만한 가방에서 검은색 비닐봉지를 꺼낸다. 갈색으로 짓무른 바나나 한 개, 그리고 방금 전 버스 정류장 매점에서 산 듯한 꽈배기가 들려 나온다. 바나나와 꽈배기를 물도 없이 꾸역꾸역 입 안으로 밀어 넣는다. 비닐봉지 부스럭대는 소리, 쩝쩝 빵 씹어 삼키는 소리에 앞좌석의 중년 남자가 짜증스러운 눈길로 돌아본다.

    무릎에 떨어진 설탕까지 손가락으로 찍어 남김없이 먹어치운 여자가 휴대폰을 꺼내 버튼을 누른다. 버스 안에서의 통화는 다른 승객에 대한 실례라는 걸 여자는 모른다. 수신자명이 '왕자님'이다. "엄마야. 인터넷 전화로 네가 다시 걸어." 1분 후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버스 안에 요동친다. 졸던 승객, 손잡이에 기대 몸을 배배 꼬던 승객들도 일제히 요동친다. 여자의 말투는 왕자님이 아니라 피의자를 심문하는 형사다. "학원 갔다 왔어? 구구단은 다 외웠고? 게임은 딱 30분만 한 거지? 네 눈빛만 봐도 다 아니까 거짓말하면 죽~는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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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터널을 지났는데도 자동차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여자가 다시 가방을 열어 서류뭉치를 꺼낸다. 고객 명단이 빼곡히 적힌 종잇장을 무릎에 얹고 빨간 색연필로 동그라미, 세모, 가위 표시를 그려나간다. 서류뭉치를 뚫어지라 노려보는 여자의 모습이 사지(死地)에 몰린 전사(戰士) 같다. '딩동!' 하고 문자 수신벨이 울린다. '뭐해?' '일해' '퇴근 안 해?' '버스야' '쉬엄쉬엄 해라, 쓰러질라' '입에 단내 나도록 살아도 될 둥 말 둥이다. 너처럼 돈 잘 벌어오는 남편이 있으면 모를까' '양육비는 보낼거 아냐' '양육비 제대로 보낼 위인이었으면 애초에 갈라서지도 않았다. 애는 둘씩이나 낳아놓고. 나쁜 인간….'

    버스가 한강 다리로 진입하자 여자가 주섬주섬 짐을 싼다. 늦여름 석양이 그녀의 뺨을 물들인다. 무엇을 보았는지 여자가 창밖으로 고개를 돌린다. 물새 한 마리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오른다. 멍하니, 탐욕이 사라진 그녀의 얼굴이 열 살은 더 늙어 보인다. 눈 밑에 박힌 기미만 빼도 훨씬 어려 보일 것을…. 어딜 그렇게 돌아다니는지, 결코 고급이라고 할 수 없는 샌들 뒤축이 하얗게 닳았다.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교통카드를 단말기에 찍으려는 순간 버스가 급정거를 하는 바람에 그녀의 가방이 기어이 뒤집어진다. "운전 좀 똑바로 하세요!" 내동댕이쳐진 휴대폰을 집어올려주자 여자가 어색하게 웃는다. 얼마나 자주 떨어뜨렸으면 액정에 실핏줄이 가득하다. 넝마 같은 저 휴대폰이 그녀의 생명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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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버스에서 내린 여자가 아파트를 향해 걷는다. 블라우스가 허리춤에서 빠져나와 너풀대는 줄도 모르고 바지런히 걷는다. 멀리서 한 아이가 달려온다. 양팔을 벌린 채 바로 그녀를 향해 달려온다.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여자도 양팔을 벌린다. 네 살 혹은 다섯살. 여자의 목을 있는 힘껏 끌어안은 아이에게 그녀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엄마다. 사랑이다.

    바닥에 널브러진 가방을 대신 든 사람은 여자의 아버지다. 딸아이를 등에 업고서 여자는 신이 나서 걷는다. 재잘대는 딸과 외손녀를 따라 늙은 아버지가 고개를 숙인 채 걷는다. 고분고분한 데라고는 없이 억척으로 살아가는 딸이 노인은 안쓰럽고 야속하다. 딸이 견뎌내야 할 삶의 굴레와 편견이 가슴을 누른다.

    바람이 분다. 김광석이 노래했던, 라흐마니노프가 사랑했던, 아, 가을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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