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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육영수

육영수 소통법③ 청와대 현관까지 들어온 전무후무한 영업용 택시

by 달빛아래서 2014. 8. 12.
  • 육영수 소통법-가까이서 본 인간 육영수

    ③청와대 현관까지 들어온 전무후무한 영업용 택시

  • 김두영
    전 청와대비서관
    E-mail : dykimriver@naver.com
    1940년생. 한국외국어대학 영어과를 졸업하고 미 위스콘신주립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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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4.08.11 09:44

 

육영수 여사는 방송극작가인 이서구(李瑞求, 1899~1981)씨나 박목월(朴木月, 1916~1978) 시인 같은 분들과의 대화를 무척 좋아해 그분들을 가끔 초대해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1973년 늦은 봄, 어느 날 오후였다. 이서구씨가 육 여사의 초대로 청와대에 들어오게 되었다. 이서구씨는 1960년대 인기 방송드라마 작가로 활약한 유명 작가였다. 그는 해방 전 서울 장안의 뭇 여성을 울렸던 악극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의 주제곡인 ‘홍도야 울지마라’의 가사를 쓴 분이기도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청와대는 경호관계로 영업용 택시가 들어올 수 없는 곳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청와대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자가용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으며, 차가 없는 경우에는 부득이 남의 차를 빌려 타고 와야만 했다. 아니면 효자동이나 삼청동에서부터 본관까지 걸어서 올라올 수밖에 없었다.
방송극작가 이서구씨.
방송극작가 이서구씨.
가끔 비서실 차를 청와대 입구에 대기시켰다가 손님을 모시기도 했지만 운전사들이 손님 얼굴을 몰라 실수를 저지르는 예가 있었다. 육 여사는 자신을 만나러 오는 사람들이 겪는 이런 불편에 대해 항상 미안하게 생각했다. 이서구씨도 자가용이 없어서 차를 빌려야 했는데 그날따라 차를 빌려 타는 일이 잘 안 된다고 연락이 왔다. 노구의 이서구씨가 청와대 본관까지 걸어서 올라오는 것은 본인에게 매우 힘든 일이었다.

이런 사정을 감안한 영부인께서 나에게 지시를 했다. 경호실장실에 연락해서 이서구씨가 타고 오는 택시를 본관까지 올려보내 달라고 부탁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영부인의 지시를 경호실장실에 알렸다. 육 여사는 “시내에 돌아다니는 택시를 아무거나 세워서 타고 올 텐데 그 택시 기사가 청와대로 올 줄 어떻게 미리 알고 나쁜 짓 할 준비를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나도 동감이었다.

이서구씨가 탄 택시가 본관 현관까지 올라왔다. 청와대 경내 입구에서부터 경찰관이 동승해서 안내를 해왔다. 아마 그 택시는 청와대 본관까지 올라온 전무후무한 택시가 될 것이다.

그 후 나는 김포공항에 가끔 갈 기회가 있었는데 경찰관들이 공항 입구에서 자가용은 차를 세워서 검색을 하면서도 영업용은 일체 하지 않는 경우를 보면서 ‘이서구씨의 택시’를 생각하곤 했다.

육 여사는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돕는 일에 지성이었다. 성장기에 후덕했던 어머니 이경령(李慶齡) 여사로부터 영향을 받은 탓도 있겠지만 남편이 거사한 혁명에 대한 공동의 무한 책임감이 더 크게 작용했으리라고 본다. 남편이 사랑하는 처자식을 두고 황천의 객이 될지도 모를 혁명에 뛰어든 것은 누가 무어라고 하든 이 민족의 가난 때문이었다고 육 여사는 믿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가난과 질병으로부터 이 나라 백성을 구해 내는 일은 박 대통령과 육 여사의 사고와 행동의 시작이요 끝이었다.

육 여사 차의 교통사고

1974년 봄에 강원도 춘성군에서 양잠대회가 열렸다. 육영수 여사가 이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승용차 편으로 경기도 가평군을 지나다가 갑자기 도로 반대편에 있던 엿장수에게 달려가려고 언덕 밑에서 뛰어든 5, 6세 정도의 소녀를 치었다. 영부인의 행차에는 평소에도 경호 차량도 없고 관할 경찰서에서 경비를 하거나 교정 정리를 하는 일이 일체 없었다. 그것은 육 여사의 뜻이었다. 육 여사는 사색이 되었다. 뒤따라오던 정소영(鄭韶永) 농수산부장관 승용차에 다친 소녀를 태워 급히 가평에 있는 병원으로 보냈다.
1974년 5월 28일 강원도 춘성군 신북면에서 열린 제3회 전국 새마을 양잠대회에 참석해 뽕을 따는 육영수 여사.
1974년 5월 28일 강원도 춘성군 신북면에서 열린 제3회 전국 새마을 양잠대회에 참석해 뽕을 따는 육영수 여사.
영부인이 양잠대회에 참석하고 있는데 경찰로부터 “소녀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는 보고가 왔다. 육 여사는 화색이 도는 얼굴로 나에게 즉시 병원에 가보도록 지시했다. 육영수 여사는 그날 양잠대회를 마친 후 오후 3시경에 소양강 댐에서 한국자연보존협회가 주최한 치어(稚魚) 방류행사에 참석해 비단잉어, 초어 등 10여만 마리의 치어를 소양강 물속에 풀어놓아 자라게 했다.

나는 그날의 모든 행사를 마친 후 영부인을 모시고 청와대에 돌아왔다가 박 대통령의 지시를 받고 곧바로 그날 밤 춘천에 있는 외과병원으로 이송된 그 소녀를 보러 갔다. 그 소녀가 아직 의식을 차리지는 못했지만 정상 호흡을 하고 있었다. 춘천에 있는 병원에 경기도 경찰국장 박영호(朴榮鎬)씨가 와 있었다. 그는 “얼굴을 들 수가 없다. 사표를 내야겠다”고 말했다.

나는 “그게 무슨 말인가. 국장이 잘못한 게 뭐가 있나. 그것은 대통령의 뜻도 아니다”고 말했다. 그 소녀는 진단 결과 골절도 내출혈도 없음이 판명되었다. 일시적인 쇼크였던 것이다. 이 소식을 전하자 영부인은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그 아이가 죽었더라면 평생 가책을 받으면서 살아가야 할 텐데…”라고 고민했다는 것이었다.

박정희 대통령께서도 걱정을 많이 하셨던 것 같았다. 어린이의 상태에 대한 나의 보고를 들은 박 대통령께서 “어린아이가 많이 놀랬던 모양이군. 괜찮다니 다행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영부인은 며칠 후 그 소녀와 소녀의 부모를 청와대로 함께 불러서 위로해 주었다.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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