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5.02.26 18:39수정 : 2015.02.27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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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수 논설위원 |
“최근에 돌풍을 일으키는 영화에 보니까 부부싸움을 하다가도 애국가가 들리니까 국기배례를 하고…, 그렇게 해야 이 나라라는 소중한 우리의 공동체가 건전하게 어떤 역경 속에서도 발전해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구성원인 우리 국민들이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할 때 나라가 발전할 거라 생각하고 공직에 있는 우리들은 더욱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난해 12월29일 박근혜 대통령이 영화 <국제시장>을 거론하며 애국심을 강조한 즈음에 때맞춰 행정자치부에선 대대적인 ‘나라사랑 태극기 달기 운동’을 벌일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행자부는 “3·1절을 앞두고 매년 벌이는 통상적인 사업”이라고 해명하지만, 사람들 머릿속엔 이미 박 대통령 발언과 행자부 방침이 중첩되어 떠오른다. 애국가가 나오면 부부싸움도 멈추고 국기를 향해 경례를 하는 것이 애국이고, 행자부 방침도 결국 애국의 길을 제시하자는 뜻이다.
20여년 전 취재현장에서 친해진 5공 출신 국회의원이 술 마시면서 농반진반의 이런 얘기를 던진 적이 있다. “그래도 5공 때는 운동권 학생들만 좀 힘들었지 일반 국민은 살기 괜찮았지 않아? 경제 좋았지, 치안 괜찮았지….”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인식의 뒤편엔 국민 기본권에 대한 외면과 묵살이 자리잡고 있다. 영화 <살인의 추억>은 그걸 정확히 보여준다. 1980년대 중반 서울에서 그리 멀지 않은 소읍 화성에서 연쇄살인사건이 벌어졌다. 여성 10명이 엽기적으로 살해됐는데도 경찰은 결국 범인 체포에 실패했다. 그때 범인을 잡지 못한 건 미 연방수사국(FBI)처럼 혈흔을 분석할 수 있는 첨단기기를 우리 경찰이 갖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다. 추가 범행이 예상되는데도 서울의 시위 진압을 위해 경찰을 빼내는 정부, 영화는 정권 안보를 위해 시민의 안전을 방기한 정부에 그 책임을 묻고 있다.
정부의 사명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가장 기본적으로, 내 가족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하고 최소한의 생존권을 보장해줘야 한다. 그걸 해달라고 국민은 세금을 낸다. 그런 점에서 지금 상황은 80년대와 뭐가 다를까. 강력사건은 하루가 멀다 하고 터지고, 탈출구가 보이지 않아 가족을 죽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가장이 속출한다. ‘도대체 정부가 우리한테 해주는 게 뭐냐’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럴수록 나라를 사랑하고 정부를 믿고 따르라는 게 ‘애국’이다.
애국이란 말처럼 이유 없이 마음을 들썩이게 하는 단어도 별로 없다. 그래서 좌나 우나 이 말을 좋아한다. 유신 시절 국기 하강식을 하며 수도 없이 들었던 이 단어는 1980년대 중반부터는 학생운동권, 좀더 정확하게는 ‘민족민주(NL·엔엘) 계열’의 지향이 담긴 말로 재탄생했다. 1986년 3월 강철 김영환이 주도한 남한 최초의 자생적인 엔엘계 학생조직 이름이 ‘구국학생연맹’이고, 그해 10월 건국대 점거농성을 주도했던 조직은 ‘애국학생투쟁연맹’이었다. 그때까지 대개의 학생조직이 민주, 민족이란 단어를 넣어 이름을 지었는데 엔엘 계열은 구국, 애국을 선호했다. 당시로선 운동권에서 생소했던 이런 단어를 북한에서 많이 쓰고 있는 건 분명했다. 그리고 1970년대 유신정권과 지금의 박근혜 정부도 이 단어를 좋아하는 건 분명하다.
현 정부의 애국주의는 선후가 잘못됐다. 현명한 지도자라면 ‘애국’을 먼저 요구할 게 아니라 국민이 국가에 세금을 내고 당연히 기대하는 기본적 권리를 먼저 보장하려 애써야 한다. 국민의 생명을 지키고, 최소한의 인간다운 생존을 이어갈 수 있게 해야 한다. 이걸 위해 대통령이 되겠다고 했던 2년 전 그의 ‘애국충정’은 어디로 간 것일까.
박찬수 논설위원
p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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