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조원진인가>(칼럼)
대한애국당이 우리공화당으로 이름을 바꾸어 광화문에 보수 우파의 새 깃발을 꽂은 지도 두 달이 돼갑니다. 그새 박원순에 의한 6.25 천막철거의 야만행위도 있었지만요, 우리공화당은 그것에 굴하지 않고 세 번째 천막설치를 예고하고 있지요.
"조원진이냐, 박원순이냐, 둘 중 하나는 죽는다"하지만 광화문이 좌파 천지였던 데서 우파의 최후이자 전초기지로 거듭남은 이땅 좌우 대결의 새 물꼬를 다시 틈이라 봅니다. 우리공화당을 이끄는 조원진 승리가 명백해 보이는 이유이죠.
또 이 시대가 난세라면 이에 맞는 인물의 출현이 있어야한다고 역사는 말해 줍니다. 진말 시기 초한전이 그러했고 후한말의 삼국연의가 그러했습니다. 난세는 영웅을 낳고 영웅이 있기에 난세를 평정합니다. 난세의 리더에겐 담력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며 이때의 결기는 덕력이랄까 인덕에서 나오는 것임도 물론입니다.
유방과 항우의 차이점은 둘 다 담력은 있으나 인덕이 있고 없고가 달랐고요 이게 결국 초한지의 결말을 가져다 줬겠지요.
광야에서 혼자 울 줄 아는 사람, 안 되는 줄 알면서도 가는 사람, 숱한 좌절을 겪고서도 임기응변의 타개법을 찾아내는 사람, 늘 자기 지지층을 수족처럼 아끼며 함께 가는 사람, 그런 풍모의 위인 즉 영웅을 한 사람 고르라면 조원진! 그일 수밖에 없죠.
1) 조원진의 "차별애"주의
공자, 맹자와 같은 유가의 사랑은 "차별애" 즉 내 부모 내 형제에 대한 사랑이 이웃보다는 강하다는 "차별적인 사랑"이란 개념을 띤다. 무조건적인 "평등애"가 아니다. 조원진은 새벽 5시면 일어나 성경 책을 펴며 하루를 기도로 시작하는 독실한 기독교인이다. 그렇다면 그의 사랑법은 모두 평등해야 할 것이나 그는 의외로 측근을 챙기는 차별적 애정이 강하다.
그 일례를 넓혀 보자. 6.25 새벽 박원순이 용역 깡패를 동원해 우리공화당의 광화문 천막당사를 기습 철거할 때 그는 이미 천막 사람들과 함께 밤을 새웠고, 철거가 강행되자 그는 삼국지의 위인처럼 용역들을 가로막았다. 태극기 앞을 지켰었다.
그의 사랑에는 목적이 있었고 이를 지키고자 하는 처절한 몸부림이 있었다. 이 점에서 조원진의 사랑은 기독교적인 사랑을 뛰어 넘는다. 유교, 유가적인 면모가 강하다.
실제 그러하다. 정치인 조원진에게 그 사랑의 정점에 놓인 것은 박근혜 대통령이다. 그 목적은 그가 지은 당가에 잘 나와 있듯이 "자유민주주의 구출하자"이다. 박근혜가 곧 대한민국일 순 없지만 박근혜에 대한 사랑은 곧 대한민국에 대한 사랑이다는 게 조원진의 생각이고 각오이다.
조원진의 비극이자 활로는 바로 여기서 출발한다.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질서를 지키기 위해서는 그 어떤 길도 박근혜 구출보다는 앞서지 않고 오직 박근혜 석방, 복귀만이 대한민국의 지킴이요, 아니라면 박근혜의 생사와 대한민국의 존망은 결국 결부될 뿐이다는 게 조원진 생각이다.
즉 그 앞에 놓인 선택지는 오직 외길이다. 그에게 박근혜 사랑이라는 "충군"이 사실상 자기 존재를 확인시켜주고 그 정치적 여망까지도 성공시킬 활로라 그는 믿는다. 어쩌면 그는 마지막 남은 충절의 "복벽(復闢)" 정치인일지 모른다. 조원진의 충군애사(忠君哀事)!
누가 알겠는가. 굽은 나무가 선산 지킨다고 했다. 모두 떠난 친박의 자리, 그 홀로 울부짖으며 외롭게 지켜냈다. 정말 광야에서 한 주도 빠지지 않고 그는 태극기 집회를 이어왔다. 태극기 부대는 그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의 "총동원령"을 하늘의 명령, 아니 박근혜 대통령의 명령으로 받아들이는 태극기 부대가 있기에 그의 오늘이 있다. 조원진의 인간적 사링은 유가적 차별애주의가 그 바탕이 된다.
2) 난세인가, 치세인가?
자연에서 밤과 낮의 구분은 확연하다. 하지만 정치에선 흑백의 분간이 어렵다. 지금은 평시인가, 준전시인가?
촛불은 한마디로 광기였다. 미친듯이 달겨들던 광우병 광란과도 같았다. 저주의 화살을 마구 쏘아대던 세월호 광분과도 물론 닮은꼴이다. 한 여성 대통령의 순절을 무참히 짓밟은 것이다. 인간이 얼마나 잔인하고 무지한 것인가 하는 것을 여실히 보여줬다. 해방과 동란의 공간에서도 한때를 만나면 의외없이 설쳐대던 좌파들의 낯설지 않은 광풍이었다.
이제 어쩔 참인가. 21세기 대한민국은 또 한 번 국체 변란의 위기 앞에 놓여 있지 않은가. 아니라고? 그렇다면 한국이 자생적 복원력을 갖고 있는가. 아마도 자유민주주의를 위한 복원의 힘이 있고 없고가 중요하지 않고 그럴 마음 자체가 없을 것이다. 연방제가 곧 평화통일이라고 믿을 텐가.
사실 돌아보면 구한말이 그랬다. 영특치 못한 고종은 이리저리 외세를 저울질하다 결국 일제에게 망하고 말았다.
문재인이 그 꼴이다. 멀쩡한 나라, 그것도 G7에도 오르는 대한민국을 일시에 거덜내고는 북한에 붙니, 중국에 붙니, 그러면서 미국에 붙니 하며 갈피를 잡지 못한다. 일본한테는 우습게 굴다 되치기를 당하는 것도 120여 년 전의 고종을 방불케 한다.
황교안은 평시라면 모를까 난세에는 맞지 않다. 소위 보수통합론도 문재인에게 격렬히 맞서는 데서 찾고 볼 일이다. 그 같은 결기를 황교안이 보여야하나, 그의 시국관은 매우 안이하다. 황교안은 광화문에 텐트를 못 쳤으나 조원진은 쳤다. 이 차이 또한 두 사람을 가르는 현주소다. 조원진은 곧 난세의 영웅이 되고 있다.(임방칼럼 2019. 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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