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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육영수

친구 김병희박사가 이야기하는 박정희

by 달빛아래서 2014. 4. 3.


 金昞熙 博士

 박정희 대통령이

 

<병희야 고속도로를 만들자는 사람은 너 뿐이구나!>
< 삶아도, 구워도 먹을 수 없는 사나이> 라고 한 김병희 박사님은 누구일까?

모든 사람들이 안된다고 반대를 하던 경부 고속도로를 만들자고 했으며 장관을 시키려
해도 싫다고 하고 재물도 달갑게 생각 않던 김병희 박사님을 청렴결백한 박 대통령이 '삶아도, 구워도 먹을 수 없는 사나이'라고 했으니, 과연 그는 누구일까?

수산대 교수, 해사, 육사 교수, 한국 과학기술 초대 이사장을 비롯해 한양대 교수,
인하대 총장 등, 반 세기에 걸친 교단 생활을 하셨고, 5,16혁명 당시에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자문위원이셨던 아흔 줄의 연세로, 박정희 대통령과 대구사범 동기로 대한민국 격동의 시대를 중심에서 살아오신 理學 博士.

회 고록의 글 중 박정희 대통령에 관한 일부를 올립니다.

<최고회의 자문위원이셨던 김박사를 어느 날 박의장이 불렀다.
박의장은 김교수가 집무실로 들어오자 대뜸 한다는 말이 "이 자식아, 한 건물 안에 있으면서
왜 안 왔지?"였다.

김교수는 "야, 지금 여기 들어오는 데 두 시간이나 걸렸어. 별로 할 말도 없는데 시간이
아까워서도 자주 올 수야 없지."라고 했다. 박의장은 부관을 부르더니 "김병희 교수만은 무상출입시켜라."라고 지시하는 것이었다.>

<내가 의장실에 들어갔을 때의 첫 인상은 그 방이 어쩌면 그렇게도 초라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마치 야전 사령관이 있는 천막 속을 방불케 했다. 특히 그가 앉은 의자는 길가에서 구두 닦는 아이들 앞에 놓인 나무의자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게다가 그가 피우는 담배는 국산 "아리랑"이었다. 당시에 내가 피우던 담배는 국산으로는 최고급품인 "청자"였고
때로는 선물로 받은 양담배였다.

하루는 그 방에 들어갔더니 마침 점심을 먹고 있는데 10원짜리 냄비국수 한 사발과 노랑 무
서너 조각이 전부였다. 나는 10원짜리 우동을 50그릇이나 살 수 있는 500원짜리 고급식사를 마치고 온 터라 몹시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 이글은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책에도 수록되어 있다.

대한민국 최고의 지성인이시며 거의 1세기를 살아오신 김병희 박사님은 현 정치권을 어떻게
보고 계실까?

김병희 박사님을 생각하며 이 글을 올립니다.
이 글을 보시는 분은 아래 박사님의 홈페이지 주소로 가 보시면 많은 것을 알 수가 있다고
봅니다.

홈 페이지 오른쪽 맨 위에 동아, 조선, 중앙, 블로그에 '안부게시판'에 메모를 남겨주시면
아무리 간단한 글이라도 꼭 댓글로 답해 주시는 김박사님의 홈페이지를 소개합니다.

 


http://home.megapass.co.kr/~gimbyngh/

 


작성자 : 홍순재

김 병희 박사가 본
인간(人間) 박정희(朴正熙)!

< 박 의장의 애국심은 지나치다고 보여질 때도 가끔 있었다. 그는 당시 장충단공원에 있던 의장공관을 쓰고 있었는데, 어느 눈비 내리는 겨울 아침에 국민학교 6학년인 장녀 근혜양을 운전병이 지프차로 등교시켜 준 일이 있었다. 그 날 저녁에 그 사실을 알게 된 박의장은 근혜 양을 불러다 꿇어 앉혀놓고, "그 차가 니 차냐, 그 차가 아버지 차냐?" 하고 힐책했다.
아무말도 못하고 울고만 있는 딸에게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 그 차는 나라 차야, 나라 차를 니가 감히 등교용으로 쓸 수 있는가 말이다!"

***
아득한 옛날, 대구사범 1학년 때 생각이 떠오른다. 박물 시간에 어느 식물 꽃 단면을 확대경을 보아가며 크고 세밀하게 그리는 작업을 한 일이 있었는데, 여러 급우들이 그린 것들 중에서 최고 평점인 'G'를 박 군이 차지했었다.

그는 일찍 경북 선산군 구미 보통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여, 그와 같은 수석들만이 응시했던
대구사범의 9 :1 이라는 입시경쟁을 돌파한 엘리트였고 그 엘리트들 중에서도 'G'라는 평점을 받을 만큼 그의 두뇌는 비상했던 것이다. 그랬기에 천군만마를 질타하는 작전계획이라면 저 미국 육사 출신의 엘리트들조차 우리 박장군을 따를 수 없다고 하지 않았겠는가? 그랬기에
쓰러져 가는 이 나라의 구출을 위한 한강 도강작전에도 성공하지 않았던가?

****
정희야! 너와 나는 대구사범에 입학해서 본관 2층이었던 1년 2조 교실에서 처음으로 만났지!
이름 글자로는 드물던 '희(熙)'를 우리 둘은 공유했기에, 나는 너에게 비록 성(姓)은 달랐어도
형제와도 같은 친근감을 느꼈었다. 내가 보던 너는 항상 모든 일에 총명했다. 게다가 너는 또 의분을 느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드는 용감한 사나이였다.

어느 날은 박물 교실의 뒤뜰에서 대구출신 S 군과 약골이었던
주 재정군이 싸웠는데, 깡패와 같았던 S는 주군을 단숨에 때려눕혀 놓고, 그래도 모자라서 맥주병을 깨어 머리를 쳤는지라 유혈이 낭자했다. 모두가 겁을 먹고 도망쳤는데, 오직 우리 박군만이 뛰어들어 그를 때려 눕히고 주군을 구출했었다.

그 용기와 그 지모와 그 애국심 등이 박 군의 그날 5.16혁명을 있게 했건만, 그에게 넘겨진
대한민국에는 GNP 83불의 헐벗은 백성들이 사월남풍에 대맥(大麥, 보리)이 누렇게 익기만을 기다리고 있는형편이었다. 이른바, 우리 겨레의 비운이었던 보릿고개를 알았기에 그는 10원짜리 냄비우동으로 점심을 때우면서도 그런 것조차도 못 먹는 불쌍한 동포들의 굶주림을
걱정했을 것이다.

또, 체인스모커(chain smoker)인 그가 담배 없이는 아무 일도 손에 안 잡히니 피우기는
해야겠는데, 그 옛날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궐련은커녕 한 봉지의 장수연이나 희연(囍煙) 조차도 손쉽게 못 얻어 피우시던 일을 회상하면, 그 '아리랑'을 피우기조차 송구스럽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 金昞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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