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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國寶)’ 오원철, 눈을 감다

by 달빛아래서 2019. 5. 31.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내 책장에는 당신이 남긴 책

"박정희는 어떻게 경제강국 만들었나" 가 꽂혀 있습니다

오랜 훗날에도 이책을 통해서

당신과 박정희대통령을 그리워하면 기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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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진영 월간조선기자의 페북에 올린 글 옮김>

대한민국의 중화학공업을 일으킨 오원철 전 대통령 경제제2수석비서관이 어제 타계했다. 향년 91세.
공무원이 되기 전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드럼통을 두드려 만든 시발자동차 회사 공장장을 지냈던 그는 대한민국을 중화학공업을 기반으로 한 세계 11위의 경제강국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는 문제에 부딪치면 반드시 한국적 현실에 맞는 실용적 해결책을 찾아내는 탁월한 테크노크라트였다. 공업화 과정에서 한 단계의 성취를 이루면, 다음에는 무엇을 먹고 살아야 할 지를 늘 고민했다. 그 덕분에 지난 40년 동안 대한민국이 먹고 살 수 있었다. 오원철 수석을 얻지 못했으면 박정희 대통령의 꿈 가운데 상당 부분은 꿈으로 그치고 말았을 가능성이 높다. 
자주국방이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원대한 꿈을 이해하지 못하는 군인들과 자주 부딪혔고, 그 때문에 5.17 후 보안사에 끌려가 혹독한 고초를 겪었다. 그렇게 망가진 명예회복에 대한 집념이 강했고, 이를 위해 여생을 대한민국 공업화의 역사를 정리하는데 바쳤다.
기자로서는 접근하기가 다소 어려운 분이었다. 경제의 기본 원리, 한국 경제발전 과정 등에 대한 사전 지식 없이 그를 만났다가는 망신을 당하고 쫓겨나기 쉬웠기 때문이다.
이제 대한민국에 오원철 전 수석과 같은 부류의 관료는 멸종했다. 공교롭게도 그가 창원, 울산, 거제 등지에 건설한 중화학공업의 영광이 저물어가고 있을 때 세상을 떠났다. 아마 그의 작품이 완전히 망가지는 것을 살아서 보지 않게 하려는 하늘의 마지막 배려가 아닌가 싶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  아래는 조선일보 기사......................................................

NewsRoom Exclusive
  1. 경제

대한민국 40년 먹거리를 만든 오원철 전 경제제2수석비서관 타계

박정희 대통령 도와 방위산업-중화학공업 건설...상상력-기획력-추진력-애국심 두루 갖춘 탁월한 테크노크라트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대한민국의 중화학공업을 일으킨 오원철 전 대통령 경제제2수석비서관이 어제 타계했다. 향년 91세. 젊은 시절 공무원이 되기 전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드럼통을 두드려 만든 시발자동차 회사 공장장을 지냈던 고인은 대한민국을 중화학공업을 기반으로 한 세계 11위의 경제 강국으로 만들어 놓았다.

오원철 전 수석은 황해도 출신으로 경성공업전문학교 화학공업과(서울대 화공과 전신)를 졸업했다. 공군 소령으로 예편한 후 국내 최초의 자동차 회사인 시발자동차 공장장으로 일하다가 1961년 5·16 혁명 직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조사과장이 되면서 관계(官界)에 몸담게 됐다. 이후 상공부 화학과장, 공업1국장, 기획관리실장, 차관보 등을 역임했다.

오 전 수석은 문제에 부딪치면 반드시 한국적 현실에 맞는 실용적 해결책을 찾아내는 탁월한 테크노크라트였다. 박정희 대통령이 1971년 11월 방위산업 건설에 착수했을 때였다. 주한미7사단이 철수하는 상황에서 박 대통령의 닦달을 받은 경제기획원이 나서서 방안을 마련하려 했지만 차관 도입부터가 쉽지 않았다. 무기생산만 전문으로 하는 군(軍)공장은 경제성이 없었고, 민영군수공장도 병기수요가 따라주지 않으면 낭비가 심했다. 그때 오원철 상공부 광공전(鑛工電)차관보가 나섰다. 그는 “모든 무기는 분해하면 부품이다”라면서 “방위산업을 중화학공업의 일환으로 추진하되, 무기의 부품별-뭉치별로 유관공장에 분담시켜 제작케 함으로써 무기수요의 변동에 따른 낭비를 극소화시킨다”는 방안을 제시했다. 김정렴 비서실장을 통해 오원철 차관보의 아이디어를 보고받은 박정희 대통령은 김 실장의 건의를 받아들여 경제제2수석비서관 자리를 신설, 그 자리에 오원철 차관보를 앉혔다.

박정희 대통령은 오원철 수석에게 임명장을 주는 자리에서 “우리나라의 안보상황은 현재 초비상상태”라면서 “우선 예비군 20개 사단을 경장비사단으로 무장시키는 데 필요한 무기를 생산하라. 처음 나오는 병기는 총구가 갈라져도 좋으니 우선 시제품부터 만들라”고 주문했다.

공군 장교 출신인 오원철 수석은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몸과 마음이 전투에 직접 참여하는 분위기와 결심에 완전히 휩싸이게 되었다. 군복은 안 입었지만 다시 입대한 것이다. 총사령관은 박 대통령, 전략참모본부장 김정렴 실장, 나는 방위산업담당 참모가 된다.”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국방과학연구소 연구원들은 철물상과 청계천 고물상을 뒤져 특수강을 구했다. 오원철 수석이 청와대로 들어간 지 한 달 여 만 인 1971년 12월 17일 국산 60밀리 박격포, 로켓포, 기관총, 소총 시제품이 청와대 대접견실에 전시됐다.

‘가용 자원을 총동원 하라’는 지시에 따라 안성에서 유기(鍮器)를 만들던 회사에게는 탄약을 만들어내라는 지시가 떨어졌는데, 이 회사가 오늘날 풍산그룹으로 성장했다. 공기총을 만들던 공장에서는 소총을 만들기 시작했다.

박정희 대통령과 오원철 수석은 공업화 과정에서 한 단계의 성취를 이루면, 다음에는 무엇을 먹고 살아야 할지를 늘 고민했다. 1972년 5월 30일 수출 10억 달러를 달성한 후, 박정희 대통령은 오원철 수석을 불러 “100억 불 수출을 하려면 무슨 산업을 육성하지?”라고 물었다. 오원철 수석은 “중화학공업을 일으킬 때가 됐다”면서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으로 이행한 일본의 예를 들어 설명했다. 이듬해 1월 박정희 대통령은 ‘중화학공업화 선언’을 했다. 오원철 수석은 중화학공업기획단장을 겸임, 중화학공업 건설의 실무 총책을 맡았다.

오늘날 세계 11위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대한민국을 떠받치는 중화학공업은 이렇게 시작됐다. 그 중심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국보(國寶)’라고 극찬했던 오원철 수석이 있었다. 특히 창원은 입지 설정에서부터 건설, 운영까지 그의 손길이 닿아 ‘오원철의 자식’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기 전, 오원철 수석은 임시행정수도 건설과 국토개조 계획에 몰두하고 있었다. 가로림만 일대를 싱가포르 두 배 크기의 공업-항만단지로 개발하는 구상도 추진하고 있었다. 오원철 수석은 이 프로젝트를 통해 산업화 과정에서 우선순위에서 밀렸던 충남-호남의 소외감까지도 해소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그 꿈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1979년 10‧26사태로 박정희 대통령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이후 오원철 수석의 운명은 급전직하했다. 방위산업 건설 과정에서 자주국방이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원대한 꿈을 이해하지 못하는 군인들과 자주 부딪혔던 그는 1980년 5‧17조치 후 권력형 부정축재자로 몰려 보안사로 연행되어, 혹독한 고초를 겪었다. 그가 건설했던 중화학공업 가운데 상당 부분은 '과잉 중복투자'라는 이유로 정리되어야 했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온 경제기획원의 자유주의 성향의 관료들이나 국가재정 관리에 신경을 써야 했던 재무부 출신 관료들도 그에 대한 평가가 박한 편이었다.

1992년이 되어서야 활동을 재개한 그는 박정희 대통령 시대의 경제발전 과정을 정리하는 일에 나섰다. 《한국형 경제건설》(전7권) 《박정희는 어떻게 경제강국 만들었나》 등의 책이 그 소산이다. 김형아 호주국립대 교수는 오원철 수석의 증언을 바탕으로 10월유신과 중화학공업의 상관관계를 밝힌 《박정희의 양날의 선택》을 펴내기도 했다.

오원철 전 수석은 기자로서는 접근하기가 다소 어려운 인물이었다. 경제의 기본 원리, 한국 경제발전 과정 등에 대한 사전 지식 없이 그를 만났다가는 망신을 당하고 쫓겨나기 일쑤였다. 박정희 대통령의 핵(核)개발과 관련된 비밀을 간직하고 있었을 것으로 여겨졌는데, 그 비밀은 끝내 무덤으로 가져가고 말았다.

지난 40여년 간 대한민국이 잘 먹고 잘 살았던 것은 ‘오원철’이라는 상상력과 기획력, 추진력, 애국심을 겸비한 탁월한 테크노크라트가 있었던 덕분이었다. 그를 얻지 못했으면 박정희 대통령의 꿈 가운데 상당 부분은 글자 그대로 ‘꿈’으로 그치고 말았을 가능성이 높다.

이제 대한민국에 오원철 전 수석과 같은 부류의 테크노크라트는 멸종했다. 그 자리는 시위소찬(尸位素餐)하는 벼슬아치들이나 아전형 관료들이 차지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그가 창원, 울산, 거제 등지에 건설한 중화학공업의 영광이 저물어가고 있을 때 세상을 떠났다. 아마 그의 작품이 완전히 망가지는 것을 살아서 보지 않게 하려는 하늘의 마지막 배려가 아닌가 싶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  아래는 팬마이크 기사 .............................................



‘국보(國寶)’ 오원철, 눈을 감다




  •  김용삼
  •  최초승인 2019.05.31 11:58:15


오원철과 박정희는 여러 가지 비난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초기 단계에서 독점을 허용하여 하루속히 공장 규모를 국제규모로 성장하도록 유도했다. 그 기업이 충분히 국제경쟁력을 확보하면 경쟁체제로 들어가는 전략을 채택한 것이다. 이처럼 일시적으로 독점기업 육성, 정경협력, 경제독재라는 비난을 감수하고 국제경쟁 단위의 중화학공업 건설 작전이 없었다면 현재와 같은 중화학공업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출처 : 펜앤드마이크(http://www.pennmike.com)


사나이들의 세계에선 자기의 가치를 알아주는 주군(主君)에게 목숨을 바친다. 오원철과 박정희 대통령의 관계가 그럴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스스럼없이 “국보(國寶)”라고 불렀던 오원철 전 청와대 제2경제수석비서관이 5월 30일 눈을 감았다. 향년 91세.

한국의 산업화 과정에서 오원철을 빼놓으면 이야기가 진행되지 않는다. 박정희 대통령에게 중화학공업의 큰 물꼬를 터 주었고, 농업국가 한국에 세계 최고 수준의 중화학공업을 건설한 주인공이 오원철이기 때문이다. 

1969년 닉슨 독트린에 의하여 주한미군 제7사단이 철수하면서 안보위기가 도래했다. 미국은 “이제 아시아 국가들은 당신들 스스로의 힘으로 지켜라”라고 선언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미국의 힘에 의지하지 않고 우리 독자적인 능력으로 이 나라를 지킨다는 자주국방을 결심하고 250만 향토예비군을 조직했다.

그 많은 예비군을 무장시킬 무기가 필요했다. 당시 한국의 공업 수준은 소총은 물론이요 총탄 한 발 못 만드는, 그저 의류봉제를 중심으로 한 경공업 제품 수출로 근근이 입에 풀칠을 하는 수준이었다. 와이셔츠나 블라우스 정도를 만들던 나라가 어떻게 M1 소총과 박격포, 105㎜ 야포를 생산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국가 최대의 관심사로 등장한다. 

1970년대 초, 세계의 군사 전문가들은 북한과 남한의 군사력 격차는 3 대 1이라고 평했다. 북한은 총기류는 물론 각종 야포와 탱크, 군함과 잠수함에 이르기까지 북한 내에서 대량생산하고 있을 때 우리는 소총 한 자루 제대로 못 만드는 수준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백척간두에 선 국가안보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을 때 그의 눈을 번쩍 뜨게 하는 아이디어를 제공한 사람이 오원철 당시 상공부 광공전(鑛工電) 차관보였다. 오원철의 지론에 의하면 무기 개발을 어렵게 생각하면 한없이 어려운 과제지만, 간단하게 생각하면 한없이 간단하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여 1971년 11월 10일 방위산업 추진을 위한 구상을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당시의 보고 내용을 오원철의 저서 『박정희는 어떻게 경제강국을 만들었나』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인식과 발상의 대전환

“여하한 병기도 분해하면 부품상태가 됩니다. 이 부품은 규정된 소재를 사용해서 설계도면대로 가공하면 생산이 가능합니다. 이렇게 제작된 부품을 조립하면 병기는 완성됩니다. 각 부품을 가공하는 공장이 몇 개, 몇십 개가 되더라도 최종적으로 결합된 병기의 성능은 완벽한 것이 됩니다. 

문제는 병기의 정밀도가 100분의 1㎜인데, 현재 우리나라의 가공수준은 10분의 1㎜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병기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100분의 1㎜를 가공할 수 있는 체제를 마련하는 것이 선결 문제입니다. 그 방법으로 국내에서 가장 우수한 유관 민수공장을 선정해서 부품별 또는 뭉치별로 분담 생산시키자는 것입니다. 각 업체는 모든 노력을 다해 할당된 부품을 정밀가공 하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생산된 부품은 한국국방과학연구소(ADD)에서 정밀검사를 실시해서 합격한 것만 선정해서 조립하면 병기는 완성됩니다. 이런 방식을 채택하면 당장이라도 병기개발은 가능하다고 봅니다.”

이날 오원철 차관보는 우리나라처럼 없는 살림에 무기만을 만드는 전용 공장을 만드는 것은 낭비라는 사실, 따라서 무기 전용 공장이 아니라 민수용 기계부품을 만드는 기계공장을 건설해야 한다는 사실, 이 공장들은 평소에는 산업용 자재를 생산 수출하고, 전시에는 병기 부품을 생산하는 민수·군수 겸용으로 건설되어야 한다고 보고했다. 

오원철은 무기만 만드는 병기 전용공장이 아니라 민수용 기계공업 공장을 건설하여 여기서 부품을 깎아 조립하는 방식으로 병기를 제작하자는 제안을 했다. 이 아이디어는 기계공업 분야에서는 거의 불모지였던 한국 상황에서 볼 때 충격적일 정도로 획기적인 아이디어였다. 

오원철의 보고를 받은 박 대통령은 심사숙고 방위산업에 착수하기로 결정했다. 이날 박정희는 김정렴 비서실장에게 “국방장관과 국방과학연구소장에게 즉시 병기개발을 시작하라고 전하시오. 대통령 명령이라고 하시오”라고 지시했다. 유사시에는 병기를 생산하고, 평화시에는 민수부문으로 전용하여 수출산업화 함으로써 병기 생산능력을 극대화하는 오원철의 방법론에 힘을 실어준 것이다.

박 대통령은 다음날인 11월 10일, 오원철을 청와대 경제 제2수석비서관으로 임명하여 국산 무기 개발에 돌입했다. 1972년 1년 간 군 당국과 민간기업의 노력을 통해 개발된 기초화기의 시제품 생산에 착수했다. 그런데 시제품 개발에는 성공했으나 소재의 부적합, 가공시설의 정밀도와 가공기술 미흡 등으로 성능이 기준에 크게 미치지 못했다. 뭔가 돌파구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각하! 중화학공업을 발진시킬 때가 왔습니다”

1972년 5월 30일, 중앙청 회의실에서 무역확대진흥회의가 끝난 후 오원철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산업구조 고도화 전략’을 보고했다. 오원철의 저서 『박정희는 어떻게 경제강국을 만들었나』에는 당시 보고 내용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각하! 중화학공업을 발진시킬 때가 왔다고 봅니다. 일본 정부는 제2차대전 후 폐허가 되다시피 한 경제를 소생시키기 위한 첫 단계로, 경공업 위주의 수출산업에 치중했습니다. 현재의 우리나라 사정과 같습니다. 그 뒤 일본의 수출액이 20억 달러에 달했을 때, 중화학공업화 정책으로 전환했습니다. 이때가 1957년도입니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67년에 일본은 100억 달러 수출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일본은 기계제품과 철강제품이 수출의 주력 상품이 되었습니다.” 

며칠 후 또 다시 박정희 대통령을 찾아간 오원철은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소재나 부품, 중간제품의 국산화를 위해 종합제철, 석유화학, 조선, 전자, 방위산업과 자동차공업 건설을 건의했다. 오원청의 보고를 들은 박정희 대통령은 방위산업 건설과 100억 달러 수출을 위한 중화학공업 건설계획 작성을 지시했다.  

1973년 1월 13일 박정희 대통령은 연두 기자회견에서 ‘중화학공업화 선언’을 하게 된다. 오원철의 아이디어에 의해 10년의 세월과 80억~100억 달러의 대규모 투자가 요구되는 대역사의 시동이 걸린 것이다. 그것은 대한민국이란 국가의 운명을 결정지은 최고의 정책이었다.

당시 한국의 수준은 민간 경제 부분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를 아는 사람이 없는 후진국이었다. 때문에 누군가가 방향과 방법을 제시해 줄 수밖에 없었다.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곳은 정부뿐이었다. 때문에 정부, 즉 오원철과 박정희는 지어야 할 공장을 선정하고, 우선 순위를 정했으며, 공장을 지을 때 들어갈 자금도 지원해주고, 공장이 지어진 후에는 어떻게 보호를 하겠다는 계획까지 미리 알려준 다음 민간 기업에 그 임무를 맡겼다. 

국제규모의 공장을 건설하려는 후진국 한국 입장에서 볼 때 수요가 부족한 상황이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한 기업에게 독점을 시킬 수밖에 없었다. 정부는 공업화 초기 단계에서 독점기업을 만들어, 이 기업을 적극 지원했다. 이 과정에서 독점 시비, 재벌 육성, 정경유착 같은 비판이 나오게 된 것이다.

개발도상에 있는 후진국 상황에서 경쟁이 만능은 아니란 사실을 오원철과 박정희는 꿰뚫어 보고 있었다. 때문에 두 사람은 정부 역할은 각 분야 공업이 국제규모로 성장하여 국제경쟁력이 생길 때까지만 도와주고, 그 후에는 민간주도 형태로 전환하는 것으로 정했다. 이런 방식이 아니면 도저히 산업화 추진이 불가능했다. 

오원철과 박정희는 여러 가지 비난을 받는 한이 있더라도 초기 단계에서 독점을 허용하여 하루속히 공장 규모를 국제규모로 성장하도록 유도했다. 그 기업이 충분히 국제경쟁력을 확보하면 경쟁체제로 들어가는 전략을 채택한 것이다. 이처럼 일시적으로 독점기업 육성, 정경협력, 경제독재라는 비난을 감수하고 국제경쟁 단위의 중화학공업 건설 작전이 없었다면 현재와 같은 중화학공업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남들이 뭐라고 비판을 하든 말든…

오원철을 비롯한 국가의 핵심 인재들이 피를 말리는 심정으로 국산 무기 개발에 전력투구하고 있을 때 야당 일각에서는 “국가안보를 정권 연장 수단으로 이용한다”면서 예비군 폐지 운동을 벌였다. 

예비군을 폐지하라는 야당의 주장이 제기되자 박 대통령은 “예비군 폐지 발언은 김일성 환영대회를 여는 것과 마찬가지”라면서 강력 비판했다. 1972년 연두 기자회견에서 박정희는 비장한 심정으로 자주국방에 대한 의지를 밝혔다. 그의 자주국방 철학은 간단했다. 자기 집에 불이 나면 무조건 그 집 식구들이 먼저 불을 꺼야 한다는 것이었다. 

중화학공업 육성은 자본집약적이고 기술집약 산업이란 특성으로 인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후진국에서 한국과 같은 규모의 거대하고 종합적인 중화학공업을 추진한 나라는 한국이 처음이었고, 성공한 사례도 없는 전무후무한 시도였다. 계획 자체가 워낙 대담했고, 요구되는 기술과 노하우, 투자자본도 충분치 않은 상황이었다. 

때문에 해외의 전문가들은 “현실을 무시한, 장밋빛 환상에 젖은 탁상 계획”이라고 비판했다. 대중경제론에 심취해 있던 국내 정치인·학자·언론들도 ‘무모한 발상’이니 ‘나라 망해먹을 짓’이라는 비난과 비판이 쏟아졌다. 

특히 경제학자들은 1970년대 추진된 박정희의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은 비교우위에 따른 시장의 산업특화 기능에 역행하는 반(反)시장 정책이며, 특정산업을 육성하는 산업 정책은 정부가 해서는 안 되는 정책이었다고 비판했다. 심지어 세계무역기구(WTO)는 정부 주도의 육성정책은 “불공정 교역을 조장하는 관행”이라며 금지하고 나섰다.

박정희 대통령은 남들이 뭐라고 비판을 하든 말든 오원철을 청와대 경제2수석비서관으로 임명하고, 대업을 맡겼다. 이때부터 오원철은 박 대통령의 태스크포스(task force)로서 1971년 11월 자주국방정책의 일환인 방위산업 육성을 첫 임무로 맡았다. 그 후 박 대통령의 중점 사업인 중화학공업 육성, 원자핵개발 연구, 기술인력 양성, 연구개발 계획, 임시 행정수도 건설계획 등을 담당했다.

오늘 우리는 오원철 수석과 박정희 대통령이 터를 닦은 그 혜택을 무한히 받으며 잘 먹고 잘 살아 왔다. 하지만 그 은혜를 모르는 배은망덕한 자들이 오원철과 박정희를 향해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무책임한, 때로는 사기극이나 다름없는 비판과 비난을 쏟아내고 있다. 

‘일하는 자에게는, 일하지 않는 자가 항상 가장 가혹한 비판자 노릇을 하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호암자전』에 나오는 삼성그룹 창업자 이병철 회장의 말이다. 고(故) 오원철 수석은 박정희 대통령을 모시고 원 없이 일을 했고, 국가발전의 기틀을 다졌으니 누가 무슨 말을 하든 즐거울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의 존재를 알아주는 ‘박정희’ 같은 거목이 뒤에 있었기 때문이다. 국가를 위해 큰 일을 하신 '국보' 오원철 수석에게 머리숙여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그 분의 명복을 빈다. 

김용삼 대기자 dragon0033@pennmike.com

출처 : 펜앤드마이크(http://www.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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