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 전대통령, 軍출신 의무실장에 “비아그라는 왜 샀나요”
신동아입력 2019-06-18 14:32수정 2019-06-18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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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비서관’ 천영식의 ‘대통령 박근혜 최후 140일’● 공세 취하려 했지만…우물쭈물하다 만신창이
● 참모들 “최순실이 관저에서 자고 갔습니까”
● 朴 “구차하다” “구질구질하다” “찌글찌글하다”
● ‘박근혜 싸이월드’ 오픈하면서 점수 딴 최순실
● ‘김병준 총리 카드’ 잃은 건 대통령과 참모의 실기 때문
● 朴 태블릿 보도 후 “모두 흥분하는데 무슨 말인들 의미가 있겠나”
● 朴은 형제 빼고는 반말 안 써, 崔와 참모에게도 “예” “예”
● 건강상 이유로 간호장교에게 비타민 주사, 영양 주사 등 자주 맞아
● 최재경 민정수석 사퇴 진짜 이유…밖에서 제대로 돕기 위한 것
국민정서법상 얘기하자면, 당시 박근혜 대통령의 잘못은 최순실이라는 사람을 너무 꽁꽁 숨겨놓은 데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사연이 제대로 해명되지 않았다. 박 대통령도 최순실의 행각에 대해 전부 알지 못하고 연일 놀라는 중이었던 만큼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가짜뉴스인지 분간해내기 어려웠다.
최순실 꽁꽁 숨겨놓은 게 잘못
이 때문인지 대통령은 최순실과 관련한 해명에 신중했고, 소극적이라는 느낌을 줄 때가 많았다. 배신감을 표시하거나 눈물을 흘린 것도 일부 참모들에게나 보인 것이지, 일반인은 전혀 알지 못한다. 억울해하면서도 최대한 말을 아꼈다. 심지어 말문을 닫은 것처럼 비쳤다. 이것은 대통령에게 결정적으로 불리하게 작용했다.
오랜 친분 관계였기에 이렇다 저렇다 말하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웠을 수 있고, 최순실과 ‘네 탓 공방’으로 번지는 상황을 우려했을지도 모른다. 2차 담화에서 표현했듯 ‘가장 어려울 때 도움을 준 사람’인데 비난하기 어려웠다고도 생각한다. 대통령이 안고 가야 할 숙제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아니면 어떻게 규정해야 할지 정확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을 수도 있다. 대통령의 조심스러운 마음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숯덩이처럼 타들어갔을 그 속을 누가 다 이해할 수 있겠는가. 대통령은 원래 가까운 사람에게조차 속마음을 잘 얘기하지 않는 스타일이다.
박근혜 정부 초대 총리인 정홍원 전 총리는 2019년 2월 조선일보와 인터뷰하면서 대통령이 최순실 이야기를 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자기가 어려울 때 심부름하고 도와주던 사람인데, 누워서 침 뱉기라고, 윗사람으로서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면서 “자신을 더 치사한 사람으로 만든다고 생각한 것 아닌가 싶다”고 분석했다.
그래도 최순실 사건이 터졌을 당시의 참모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자를 건 자르고, 공세를 취할 건 공세를 취할 수 있었다고 본다. 그랬다면 사태가 이렇게까지 악화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후회할 수밖에 없다. 2016년 11월 한 달 동안은 최순실에 대해 너무 우물쭈물하다가 만신창이가 돼버린 측면이 강하다.
이렇게 된 배경에는 대통령을 가까이에서 보좌한 ‘3인방’(정호성, 이재만, 안봉근)을 대신할 세력의 부재 탓도 있다. 3인방이 부정적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정작 어려운 시기에는 필요했다. 위기의 순간에는 대통령을 잘 이해하는 참모가 수습에 나설 수밖에 없는데, 그런 구조가 깨진 것이다.
이런 중간 통로의 부재로 모든 판단과 결정은 대통령에게로 쏠릴 수밖에 없었다. 대통령의 분명하지 못한 상황 대처로 오해가 쌓여갈 때, 언론은 청와대에 들어간 침대 개수와 비아그라 등을 운운하며 비정상적 지도자로 몰고 갔다. 답답해서 대통령에게 불쑥 물어본 적이 있다.
“대통령님, 최순실이 관저에서 자고 갔습니까 아닙니까? 말씀을 안 하시니 쓸데없는 오해가 공연히 확산되고 있습니다.”
朴 “찌글찌글하게 하지 않겠다”
원인이 어찌 됐건 수많은 오보에 대해 뾰족한 대응 방법을 찾지 못한 탓에, 박근혜 정부의 홍보 기능은 왜 그리 무기력했느냐는 비판을 두고두고 받고 있다. 이 모든 게 2016년 11월 초의 상황이다.
박 대통령은 이때쯤 “구차하다”는 말을 부쩍 자주 입에 올렸다. 대통령이 자주 쓴 단어는 “구차하다”와 “구질구질하다”이다. 둘 다 비슷한 어감을 갖고 있다.
대통령이 그런 단어를 쓸 때마다 참모들은 대통령에 대한 일종의 ‘추궁’을 멈췄다. ‘여성으로서, 인간으로서 얼마나 비참하고 구차했으면 저런 말을 할까’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대통령의 마음을 받아들였다.
물론 더 비참하고 구차한 일이 생길 것이라고 예상은 됐지만, 차마 더 진도를 내기는 어려웠다. 직무 정지 후 대통령이 관저에서 변호인을 만날 때도 “구차하게 하지 않겠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고 한다. 한번은 대통령이 “찌글찌글하게 하지 않겠다”는 표현을 사용해 참모들이 놀란 적이 있다.
나중에 대통령과 대화를 나누게 됐을 때 초창기 대응 실패 이유를 물었다. 대통령은 “초창기에 좀 더 적극적으로 대응했으면, 일이 이만큼 커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통령은 상황을 충분히 이해했다. 여기서 초창기란 2016년 10월 24일 최순실 태블릿 PC 관련 JTBC 보도가 나온 때부터 12월 9일 국회에서 탄핵소추 가결까지, 즉 10월 말에서 12월 초까지 한 달 반 동안의 시기를 말한다. 이것을 대통령 운명의 ‘골든타임’이라고 하고 싶다.
“그때는 광풍이었습니다. 누구도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단두대가 나오고, 모두 흥분 상태였습니다. 태블릿PC 보도가 나온 다음 언론 보도를 모두 사실로 알고 흥분하는데, 무슨 얘기를 한들 의미가 있었겠습니까. 어떤 얘기도 통할 수 없었습니다.”
대통령은 무기력을 호소했다. 대통령은 또 “결국 언론, 국회와 싸우게 됐는데…내가 무능하다고 생각합니다”라고 자책했다.
그 광풍의 시대, 미주알고주알 해명하는 것이 본인을 더 구차하게 만든다고 생각한 것이다.
운명이었을까. 대통령은 역사상 가장 구차한 수렁으로 점점 빠져들었다.
삼성동에서 음식 준비하던 사람
또 여러 얘기를 종합했을 때, 원래 언니 최순득이 대통령과 친했고, 뒤이어 최순실이 더 가까워졌다. 대통령은 최순득과 가까웠던 시절이라 하더라도 적어도 국회의원이 된 후에는 그의 집에 간 적이 없는 것으로 주변 사람들은 기억하고 있다.
일부 보도에 나온 대로 2004년 대통령이 삼성동 자택을 개방했을 때 최순실이 집에 있었다. 음식 준비 등을 하며 ‘기자 맞이’를 같이했다. 대통령은 당 대표를 맡으면서 처음으로 삼성동 자택을 개방했다. 필자인 나도 당시 기자 시절이어서 삼성동 자택을 방문해 식사를 같이 했지만, 최순실이라는 존재를 알지는 못했다. 음식 준비를 도와주던 여성이 몇 명 보였지만, 그 사람들에 대해 누구도 관심을 갖지는 않았다.
대통령은 당시 방문한 기자들에게 계영배(戒盈杯)를 통해 술을 직접 따라줬다. 2층 침실을 안내하면서 피아노를 직접 연주하는 등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삼성동 자택 개방 기사는 대부분 언론에서 아주 호의적으로 보도했다. 특히 계영배는 잔의 7할이 되면 밑으로 흘러내려 ‘넘침을 경계하는 잔’으로 알려졌고, 박근혜 대표의 상징 같은 잔이었다. 평생을 절제하면서 살아온 삶을 표현하고 있었다. 계영배를 타고 흘러내렸던 삼성동 자택 개방의 그 아련한 절제의 추억은 그곳에 있었던 주목받지 못하던 한 사람에 의해 10여 년 뒤 많은 사람에게 배신과 비수로 되돌아온 셈이다.
관계자들에 따르면, 최순실은 처음엔 남편 정윤회를 대통령에게 소개하면서 직접 나서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조금씩 업무와 연결됐다.
비서들에게도 “예, 예”
다수의 증언에 따르면, 최순실이 대통령과 업무로 맺어진 계기는 2002년 미니 홈피 ‘싸이월드’ 오픈으로 보인다. 당시 유치원을 운영하던 최순실은 유치원 홈페이지 개설을 하면서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 눈을 뜨게 됐다. 그러면서 대통령에게도 미니 홈피 아이디어를 냈다는 것이다. 대통령은 당시 미니 홈피로 큰 인기를 누린 바 있다. 최순실은 조카들로부터 그 아이디어를 얻은 것으로 알려졌다. 어쨌거나 이 아이디어를 최순실이 주도하면서 대통령의 점수를 크게 따게 됐다고 한다.
정윤회라는 존재가 사라진 것도 결과적으로 최순실에게는 독이 됐다고 할 수 있다. 정윤회가 있었으면 최순실의 행태가 상당 부분 제어됐을 건데 유일한 견제 세력이 사라지면서 최순실의 폭주가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정윤회가 한번은 “집사람이 아직도 대통령을 돕고 있느냐”는 취지로 놀라워한 적이 있다고 한다. 최순실은 이혼 후 거스를 게 없는 듯 행동했다.
그렇다면 최순실은 어떤 재주를 지녔기에 대통령 곁에 오래 머물 수 있었을까. 관련자들에 따르면, 최순실은 오랜 시간을 대통령과 가깝게 지내왔기 때문에 대통령의 개인 성향을 너무 잘 파악하고 있었다. 특히 의상에서는 기가 막히게 대통령 취향을 알아냈다고 한다. 대통령이 좋아하는 디자인이나 컬러 등을 최순실은 귀신처럼 맞춰냈다. 행사 성격에 따라 디자인과 색깔을 조정하는 능력도 있었다. 국군의 날에는 감색 옷을, 중국 방문 시에는 중국과의 관계를 고려해 의상을 선택했다. 이런 능력이 대통령의 취향에 잘 맞아떨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대통령은 본인의 옷을 직접 선택한다. 차이나 스타일 옷도 20여 년 전 대통령이 디자인해서 만들어낸 옷이다. 대통령은 필요할 때마다 직접 디자인한 옷 그림을 의상디자이너에게 전달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최순실이 이 같은 대통령의 취향을 파악하고 있었던 것은, 그의 생존 본능의 발로였던 것으로 보인다. 대통령이 최순실에게 공손하게 응대한다는 점을 의아하게 생각하는 일부 기사가 나왔다. 특히 어떻게 된 일인지 국정농단 수사 과정에서 법적으로 유출하지 못하게 돼 있는 압수 파일이 통째로 언론에 유출·공개되면서 대통령이 유독 최순실에게만 공손했던 것처럼 곡해되기도 했다. 이 녹음 파일은 정호성이 취임사 작성에 참고하기 위해 대통령과 최순실 등과 나눈 대화를 녹음한 것이었다.
어찌 됐건 대통령과 대화를 나눠본 사람이라면 그 대화 스타일을 대체로 이해하게 된다. 대통령은 누구와 대화하더라도 상대방 말을 잘 자르지 않는다. 대통령은 상대방의 말에 수긍하면 “예 예” 하며 반응하고, 말이 맘에 들지 않으면 대답을 하지 않는다. 가까운 의원들과 대화할 때도 대통령 앞에서 자기들끼리 논쟁하기도 하지만, 대통령이 적극적으로 끼어들지는 않는다고 한다. 꼭 필요한 말만 할 뿐이다.
아랫사람이나 비서들에게도 반말을 하지 않다 보니, 자연히 “예, 예”라는 표현이 잦을 수밖에 없다. 대통령과 대화하다 보면, 깍듯하게 응대를 받는 순간 참모들이 오히려 어색하게 느끼는 경우도 많다. 그냥 남들처럼 반말로 지시하면 비서 입장에서 더 편할 것 같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대통령의 어법은 한국적 상하 관계에는 잘 맞지 않는다. 한국 사회에서 아랫사람에 대한 지나친 공대는 오히려 장벽의 일부로 해석될 수 있다. 하여간 관련자들에 따르면, 지구상에서 대통령이 반말을 하는 대상은 두 동생인 박근령, 박지만과 조카들뿐이라고 한다. 그것은 호불호의 문제가 아니라 평생을 유지해온 대통령의 스타일일 뿐이다.
崔, 대통령 있을 때와 없을 때 행동 달라
다시 최순실의 행적에 대한 분석으로 돌아간다면, 문제는 최순실의 이중적 행태가 대형 사고를 쳤다고 볼 수 있다. 최순실을 알고 지낸 청와대 인사들에 따르면 최순실은 대통령 앞과 그렇지 않은 경우의 행동이 달랐다.
말투에서부터 차이가 났다. 대통령 앞에서는 조신한 척 “네, 네”라는 말투를 사용했다. 대통령이 없는 장소에서는 쌍스러운 말을 남발했다고 한다. 최순실은 대통령 앞에서 대통령비서들에게 반말을 하지 않았다. 대통령만 없으면 “이렇게 해”라며 반말을 했고 자기과시도 일삼았다고 한다. 청와대 들어올 때 최순실은 주변에 들으라는 듯 “(대통령이) 또 들어오라 그러네”라며 자기과시를 했다는 것이다.
특히 최순실이 대통령 앞에서는 사심 없이 일하는 것처럼 포장하고, 조심하며 보안을 중시하는 사람처럼 언행을 했다는 점은 최순실 사건 발생 후 주변 사람들을 깊은 배신감으로 몰아갔다. 주변인들에 따르면 최순실은 툭하면 ‘보안’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면서, 정작 본인은 고영태 씨등에게 행적을 남기고 다닌 것으로 나타났다. 더구나 고영태 일당과 사익을 꾀하고 여기저기 ‘갑(甲)질’로 비치는 행동을 하면서 인심을 잃다가 사이가 틀어져, 그들이 언론에 제보하면서 이 같은 결과까지 오게 된 것이다. 고영태 일당을 비롯해 최순실 주변에서 일을 했던 사람들이 모두 최순실을 배반한 것을 보아도 최순실의 인간 됨됨이에는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거기에 각종 오보와 추측성 기사가 쏟아져 국민 여론에 기름을 부었고, 최순실 사건은 역사상 최악의 비리사건으로 둔갑한 것이다.
어쨌든 이 같은 최순실의 행실을 대통령이 전혀 알지 못했다고 주변 사람들은 증언하고 있다. 물론 태도가 나쁜 것이 비리와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최순실 사건의 경우 복기해볼 때 결국 나쁜 행실이 비리로 이어지는 데 일정 정도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사람을 곁에 두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대통령도 비난을 당하게 된 것이라고 본다. 나는 대통령이 2016년 11월 4일 2차 담화에서 최순실 사건에 충격을 받아 “이미 마음으로는 모든 인연을 끊었지만, 앞으로 사사로운 인연을 완전히 끊고 살겠다”고 말했을 때 가슴이 먹먹했다. 당연히 필요한 발표였으나 ‘인간 박근혜’의 측면에서는 그나마 몇 명 없는 사적인 관계가 완전히 끊기게 되고, 대통령은 그야말로 사적 영역을 거세당하는 절대 고독의 존재가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최순실의 비리 의혹이 연일 이어지는 가운데 청와대는 2차 담화를 앞둔 11월 2일 김병준 씨를 새 총리로 내정했다는 발표를 했다. ‘김병준 카드’가 성공하고 담화가 약발을 거두었다면 대통령은 위기에서 극적으로 살아났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낱같은 희망을 안고 살던 시기였다.
전날인 11월 1일 오후 대통령을 집무실에서 만났을 때, 김병준 카드를 미리 알고 있었으므로, “정말 최선의 선택인 것 같다”고 대통령에게 말했다. 그 다음 ‘비서실장만 잘 임명하면, 인사를 통해 어느 정도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안철수 끌어안을 카드
김병준 카드는 야당을 배려한 인선이었다. 노무현 정부의 정책실장이었던 데다 안철수 국민의당 의원으로부터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영입 제안을 받고 있었던 만큼 야당과 통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최소한 안철수를 끌어안을 수 있는 카드였다.
김병준의 사고방식은 자유주의에 기반한 보수 성향이면서도, 특별히 이념지향적 스타일이 아니었다. 본인 스스로가 이념지향성을 거부해왔다. 국가관의 중심이 잡힌 반면 이념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매력적인 카드였다’고 생각했다. 대통령이 위기였으니 발탁한 인사였지, 평상시라면 힘들었을 것이다. 손학규 현 바른미래당 대표도 당시 물망에 올랐지만, 김병준이 연착륙할 수 있는 카드라고 봤다.
김병준은 ‘대통령 권력’이라는 저서에서 박근혜 정부 총리 후보 지명을 수락한 이유와 관련, “저급한 진영논리, 이를 기반으로 분노를 부추기고 선동을 일삼는 천박한 정치…세월은 갔지만 돌고 돌아 모든 게 다시 그대로 있다…탄핵하건 하야를 시키건 국정은 국정대로 챙길 총리 하나 추천하지 못하는 정치를 계속하고 있다”고 적었다. ‘진영논리를 극복하고 누군가 국정을 챙겨야 한다는 점에서 총리직 제안을 수락했다’는 뜻으로 읽혔다.
야당(민주당)에 국무총리를 추천하라고 했더라도 김병준 이상을 추천하지 못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실제 나중에 야당에 총리 추천권을 넘겼을 때 야당은 총리후보를 추천하지 못했다. 겉으로는 가라앉는 정권에 협조할 수 없다는 논리였지만, 실제론 김병준 이상의 카드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야당은 그러면서 총리 추천 대신 탄핵 추진을 하겠다고 말을 돌려버렸다. 김병준의 말대로 야당은 진영 정치를 택했다.
누굴 임명해도 반대할 분위기
김병준 카드는 시작부터 삐걱거렸다. 우선 발표 전에 야당에 동의를 구하는 절차를 제대로 밟지 않았다. 야당에 귀띔이라도 해줬으면 나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대통령의 보좌 기능이 구멍난 데서 비롯된 일로 해명됐다.
그래도 통보 이상의 조치는 어려웠다. 야당과 흥정했으면 어느 세월에 새로운 총리를 뽑을 수 있었겠는가. 당시 상황이 야당과 협의한다고 될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야당은 이미 박근혜 정부에 ‘KO승’을 자신하며, 수많은 KO 펀치를 날리고 있던 상황이다. 굳이 박근혜 정부에 협조해서 시간을 벌어줄 생각이 없었다. 야당은 총리로 누굴 임명해도 반대하고 나설 분위기였다.
야당은 자신들이 수용할 수 있는 중도적 인물이라면 대승적으로 협조해줬어야 한다. 야당도 처음에 크게 반대하지 않다가 촛불 여론을 의식해 비난 대열에 합류했다.
김병준 총리 내정자는 참으로 감각이 빠른 분이었다. 상황이 녹록지 않다는 점을 깨닫는 순간, ‘개인기’로 상황을 뚫기 위해 노력했다. 김 총리 내정자는 “경제·사회 분야에서 전권을 행사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런데 돌발 사고는 11월 4일 대통령의 대국민담화 때 김 총리 내정자 언급이 빠지면서 빚어졌다. 언론은 김 총리 내정자가 전권을 충분히 확보받지 못한 것이라고 틈새를 후벼팠다. 부주의한 탓이지만 결과적으로 대통령이 틈새를 허용한 셈이다.
여기에다 청와대가 김 총리 내정자를 지원사격하는 데 적극적이지 못했다. 당시 언론은 ‘외치(外治) 박근혜, 내치(內治) 김병준’을 쓰면서 김 총리 내정자의 권한 확대를 기정사실화했다. 이것은 “경제·사회 분야에서 전권을 행사한다”는 논리에서 한발 더 나아간 것이었다.
“내치 전권 준다”고 했어야
그러나 내·외치 구분이 모호하고 헌법상 이 같은 분할통치는 불가능했다. 1년 반 뒤 문재인 정부도 헌법 개정을 추진하면서 실제적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국회 추천 총리를 수용하지 않았다. 같은 논리와 맥락이다. 문재인 정부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내용을, 당시 언론은 당연한 듯 밀어붙이고 있었다. 언론은 이원집정부제 같은 권력 형태를 기정사실화했다.
언론이 대통령과 김병준의 틈새를 벌리던 5일과 6일 이틀 동안 청와대는 수습을 하지 못했다. 수세에 몰린 청와대로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실기(失期)한 것이다.
뒤늦게 7일 홍보수석이 기자들에게 김병준 총리 내정자에게 ‘막강한 권한’을 준다는 애매모호한 논리를 폈으나 먹혀들지 않았다. 이때 그냥 논리적으로 맞지 않더라도, 내치 전권을 준다고 했어야 했다. 대통령 운신의 폭이 더욱 축소될 것을 우려한 일부 논리 때문에 김 총리 내정자에게 과감한 지원사격을 하지 못한 게 못내 아쉽다. 나는 개인적으로 기자들에게 김 총리 내정자를 ‘내치 대통령’이라고 표현해도 된다고 말했으나, 당시 청와대 전체 논리와 지형을 바꾸지는 못했다.
물론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김병준 카드가 살아났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본질적으로 김병준 카드는 야당과의 기 싸움에서 살아남지 못했다. 청와대는 김병준을 지켜낼 힘이 없었다.
대통령은 11월 7일 오후 늦게 김병준 카드를 포기하기로 하고 국회에 통보했다. 그리고 8일 정세균 국회의장을 찾아가 새로운 총리의 국회 추천을 요청했다.
“국회에서 여야 합의로 좋은 분을 추천해주신다면 그분을 임명해서 내각을 실질적으로 총괄하도록 하겠습니다.”
대통령은 국회의장에게 이렇게 제안했다. 김병준 카드는 제대로 기능도 해보지 못하고 일주일 만에 사라지게 됐다. 김병준 카드가 살아나지 못하면서 박근혜 정부의 마지막 구명 동력도 사라지게 됐다.
대통령이 그해 11월 1일 내게 한 말
대통령은 11월 1일 나를 만났을 때 말씀의 상당 부분을 정책 홍보의 필요성에 대해 할애했다. 그 어려운 시절을 지탱해주는 마지막 한 가닥 희망을 정책에 둔 것 같았다. 밤낮없이 일했으니 박근혜 정부 정책을 통해 국민이 진정성을 이해해줄 것이라는 한줄기 기대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였다.
“나는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지만, 사실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미 최순실 사건으로 국민은 박근혜 정부 정책에 대해 아무 관심을 갖지 않고 있었다. 순수하면 국민이 언젠가 이해해줄 것이라는 비현실적 믿음에 근거한 것이다.
그 당시 청와대는 어느 정부에서도 하지 못한 장기 미해결 과제를 박근혜 정부가 이뤄내고 있다는 점을 홍보하려 했다. 물론 하지 못했다. 지금 보면 상당히 의미 있는 내용이다. 특히 공무원연금개혁과 기초연금, 노동개혁 등은 대통령이 애착을 가진 개혁이었다. 공무원연금개혁은 향후 70년간 매일 194억 원, 총 487조 원의 국민 부담을 경감시키는 개혁 조치였다. 물론 이 조치를 공무원들은 싫어했다. 기초연금은 기존 계획을 14년 앞당겨 448만 명에게 종전보다 2배의 지원을 하는 고령화 시대 복지개혁이다. 노동시장 이중구조 개선 등을 위한 노동개혁은 향후 5년간 37만 개의 일자리 창출을 위한 시작이었다.
대통령은 정부 말기에 반대 세력이 기승을 부리는데도 불구하고 공공, 노동, 금융, 교육 등 4대 개혁과제를 도출해 추진해온 데 대해 자긍심을 갖고 있었다. 대통령은 그 험난한 11월에도 정책에 대한 이 같은 집착을 포기하지 않았다
몸 둘 바 모른 의무실장, 허탈해한 대통령
2016년 가을은 정부 정책이 아니라 최순실 사건만이 언론 관심의 대상이었다. 언론이 대통령을 끌어내렸다고 좋아하는 기자들도 있지만, 검증되지 않은 뉴스의 과다 생산이라는 오명 자체를 부인하기 어렵다.
물론 오보가 아닌 기사도 많다. 하지만 언론은 100개의 보도를 자랑하기 이전에, 한 개라도 오보가 발생한 것에 더욱 무거운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언론이 마녀사냥의 도구로 활용되면, 우리나라의 지성적 풍토는 파괴될 것이다. 그래서 언론은 민주주의와 인권의 마지막 보루인 것이다. 기사 하나가 사람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다는 점에서 ‘언론 윤리’의 중요성은 수습기자 때부터 수도 없이 가르친다. 그것이 언론의 공정성이고 책임의식이다. 특히 개인의 사생활을 보도하는 행위는 신중해야 한다. 대상자가 아무리 공인이라도 사생활 보도를 근거 없이 제기할 권한을 언론에 준 건 아니다.
10월 24일 JTBC 태블릿PC 보도 이후 대한민국 언론은 ‘오보 특권’을 가진 것처럼 비쳤다. 그전까지는 조금씩 조심했으나 정부가 오보를 통제할 힘과 권위를 상실하면서 봇물 터지듯 나왔다. 검경이 오보를 통제하는 게 아니라 불분명한 사실을 흘려 오보를 조장하는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언론의 자정 기능이라는 것도 의미 없었다. ‘특종 경쟁’이라는 명분으로 오보는 무한 재생산되고 있었다. 착한 기자들이 손해 보는 세상이었다. 많은 기자가 오보를 냈지만, 그 이상으로 많은 기자는 오보를 낸 동료 기자들을 비난했다. 그래도 오보의 승리였다. 지금도 그 기자들과 만나 그 시기를 떠올리며 씁쓸한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다.
종합편성채널의 경우 최순실 관련, 하루에 20개 안팎의 기사를 생산했다. 깊이 있게 취재하는 것은 애당초 무리였다. 취재원에 상관없이 ‘카더라’ 보도가 줄을 이었다. 종편이 선도했지만, 신문이라고 크게 다를 게 없었다.
11월 말 청와대 의무실에서 경호실 용도(고산병 치료)로 구입한 ‘비아그라’(성 기능 장애 치료제)를 보도하고, 기도폐색 등 응급 상황 발생 시 사용하는 ‘에토미데이트’(수면마취제)를 ‘제2의 프로포폴’이라고 보도하면서 마치 대통령의 마약 복용과 성적(性的) 연관성이 있는 것처럼 꾸며져 보도될 때는 아연실색했다. 비아그라 보도가 나왔을 때, 대통령은 의무실장에게 전화해 한숨을 내쉬었다.
“비아그라는 왜 샀나요?”
육군 출신의 의무실장은 몸 둘 바를 몰랐다. 고산병 치료제로 경호실에서 과거 정부부터 구입하던 일이라고 말하자, 대통령은 너무나 허탈해했다. 이런 일이 비일비재했다. 주사 및 미용시술 의혹 등이 쏟아질 때도 의무실장은 식은땀을 흘렸다. 의무실장에 따르면 대통령은 건강상의 이유 때문에 간호장교를 통해 비타민 주사와 영양 주사 등을 자주 맞는 편이며, 주사를 맞을 때도 1시간 이내로 줄이라고 하고, 주사를 맞으면서도 업무 자료를 본다는 것이다. 이것도 이미 언론에 기사가 도배되고 난 한참 뒤의 설명이다. 의무실장은 대통령이 마치 무슨 ‘이상한 주사’라도 맞은 듯이 일방적으로 당하는 데 대해 안타까워하며 어쩔 줄 몰라 했지만, 군 출신이라 대통령의 지시 없이는 어떠한 말도 하지 못하는 스타일이었다.
우주, 혼, 현몽…주술적 분위기 극대화
우주와 혼에 대한 주술적 보도 역시 황당했다. 파견된 공무원 출신 청와대 행정관이 파울로 코엘료의 책 ‘연금술사’에서 ‘간절히 원하면 온 우주가 도와준다’는 대목을 인용해 연설문 초안을 작성한 것인데, 최순실이 대통령에게 입력시킨 주술적 메시지로 둔갑됐다.
이처럼 11월은 ‘오보의 홍수’였다. 최순실과 무기중개상 린다 김 사이 친분이 있고, 무기 거래에도 손댄 의혹이 있다는 보도에 대해 록히드마틴사가 나서서 부인했다.
‘청와대 들어간 침대 3개, 2개는 누가 썼나’라는 제목의 선정적 보도도 있었지만, 사실과 달랐다. 청와대는 “2개의 침대가 각각 관저와 저도에 비치돼 있고, 나머지 1개는 사용되지 않고 있다”고 해명했다.
‘최순실이 관저에서 잠도 자고 갔다’는 근거 없는 보도도 11월 2일 있었다. 최순실은 관저에서 잠을 잔 적이 없다. ‘최순실이 해외순방에 동행했다’는 오보에 대해 사실이 아니라고 밝혔는데도 몇몇 언론사가 계속 기사화했다. 이런 기사는 거의 매일 쏟아져 나왔다.
최태민의 ‘현몽’ 관련 기사도 단골 메뉴였다. 11월 9일 최태민이 영애 시절부터 ‘국모(國母)’를 주입했다는 기사를 비롯해, 최태민 일가를 활용해 주술적 분위기를 극대화하는 내용이 유독 많았다. 이는 대통령을 바보로 만들었다.
지금 보면, 언론 보도는 약간의 패턴을 갖고 있었다. 미르나 K스포츠재단 관련 비리는 11월 초에 사실상 높은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최태민, 최순실 일가와의 관계를 강조하는 기사 △세월호 당일 행적에 의혹을 제기하는 기사 △미용이나 성형 의혹, 여성 비하 기사 등이 11월 말과 12월에 주류를 이뤘다. 심지어 세월호 사고 당일 성형 의혹 기사도 많았다. 이런 보도들은 최순실 비리나 국정농단 사태의 본질과도 상관없는 일이다. 국민감정을 악화시켜 통치 능력이나 자격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대통령의 얼굴이 ‘프티 성형 백화점’이라는 기사는 지금 봐도 어의가 없다.
문재인 정부의 가짜뉴스 논쟁
문재인 정부는 집권 2년차로 들어서면서 가짜뉴스 논쟁에 뛰어들었다. 어느 정권이든 겪는 늪에 빠져든 것이다. 그중 한 가지만 지적하고자 한다. 김의겸 전 청와대 대변인이 언론의 보도 문제점을 지적하다가 “더욱 씁쓸한 것은 과거의 보도 태도와 너무나 다르기 때문”이라고 언론을 비판한 대목이 목에 걸렸다. 탄핵 정국 때는 수많은 오보를 즐겼으면서도 과거의 보도 태도를 거론하는 것은 정당성을 얻기 어렵다.
탄핵 정국 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여성 대통령의 끝을 보려면 한국의 여성 대통령을 보라”고 말했다는 뉴스가 TV를 통해 방송됐다. 한 네티즌이 장난으로 올린 글이 퍼진 것이다. 당연히 가짜뉴스다. 대한민국 대통령의 품격을 떨어뜨리는 뉴스이지만, 어느 정치 세력도 문제를 제기한 적이 없다.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이 출마를 앞두고 있으니까, 안토니오 구테헤스 신임 유엔 사무총장이 “반 총장의 대선 출마가 유엔 결의 위반이라고 지적했다”는 기사가 지상파 라디오를 통해 전파를 탔다. 역시 가짜뉴스다. 대선을 앞둔 민감한 시기의 범죄다. ‘드루킹 사건’이 무서운 것도 ‘드루킹’이 대선 등 선거에서 활동했기 때문이다(드루킹 사건은 경제적공진화모임(경공모) 대표 김동원(필명 드루킹)을 비롯한 경공모 회원이자 더불어민주당 권리당원들이 김경수 경남지사와 공모해 인터넷에서 각종 여론조작을 했다는 혐의로 기소돼 재판을 받고 있는 사건. 김 지사는 1심에서 댓글조작 혐의에 대해 징역 2년 실형을,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에 대해선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항소했다).
대한민국 과거의 보도 태도를 따지자면, 어느 언론이나 어느 정치인도 자유롭지 못하다. 정치인들은 때로 오보를 즐기고, 때로는 오보의 피해자가 되기 때문이다. 유리한 과거와 불리한 과거를 나누고, 그를 통해 논리를 전개한다면 언론이 수긍하지 않을 것이다.
적대주의가 만든 정치 도구
중요한 사실은 우리나라 가짜뉴스의 경우 대부분이 정치적 목적으로 유통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미국의 가짜뉴스가 돈벌이 목적에서 출발한 것과 차이가 있다. 서방의 가짜뉴스가 마케도니아의 17세 소년이 트럼프 지지자를 대상으로 가짜뉴스를 생산해 약 6만 달러의 광고 수익을 냄으로써 형성된 ‘디지털 골드러시’의 일환이었다면, 우리는 오로지 정치적 목적이다. 가짜뉴스가 정치 도구로 활용되고 있다. 이 차이를 인정해야 해법이 나온다. 그것이 본질이다. 그런데 문재인 청와대의 각종 어법은 가짜뉴스의 정치적 성격을 더욱 강화하고 있는 것이다.
반대편에 대한 극단적 적대주의를 통해 가짜뉴스는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기승을 부릴 것이다. 가짜뉴스를 없애려면 정치적 적대 구조를 청산하거나 완화해야 한다. 또 상대방을 배려하는 정치문화가 형성돼야 한다. 단순히 법적 규제를 강화하는 것으로 해결될 수 없다. 문재인 정부는 무수한 오보 터널을 지나온 박근혜 정부를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권력과 언론의 싸움에서 결국 권력이 진다.
영국 BBC의 토니 홀 사장은 2018년 세계공영방송 총회 참석차 서울을 방문했을 때 가짜뉴스에 대한 권력적 특성을 강조했다. 카메룬 군대가 두 명의 여성과 두 명의 어린이를 총으로 협박해 끌고 가 총살시킨 영상이 인터넷에 유포되자 카메룬 정부는 “가짜뉴스”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BBC가 탐사보도를 통해 사실임을 확인하는 보도를 했다는 것이다. 정치적 목적으로 거론되는 가짜뉴스의 경우 정치 행위자의 주장을 믿을 수 없으며 끝까지 진실을 탐구함으로써 해결된다는 암시였다.
특히 가짜뉴스는 권위적 방식, 다시 말해 ‘꼰대’식으로는 잡을 수 없다. 한겨레신문 성한용 기자는 “가짜뉴스 문제의 출발점은 가짜뉴스라는 용어를 버리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면서 “가짜뉴스 대신 허위정보라는 단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동의한다. 가짜뉴스라는 말 자체가 정치적 목적에서 이뤄지는 상대방 저격용 정치용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다만 허위정보를 가려내는 데 사회와 국민이 건전하게 나서도록 분위기를 형성해주어야 선진국으로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朴 참모들에게 “중심을 잡고 가야 한다”
11월 4일의 제2차 대국민담화가 성공하지 못한 가장 큰 외부 변수를 꼽으라면 단연 검찰수사라고 할 수 있다. 형사불소추 특권을 가진 현직 대통령이라도 빠져나갈 수 없는 국면이 검찰수사에 의해 상당 부분 조성되고 있었다.
검찰 수사에서 최대 악재는 검찰 손에 쥐어진 ‘안종범 다이어리’와 ‘정호성 녹음 파일’이었다. 검찰로서는 예상 밖의 전리품이었고, 대통령으로서는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정호성 녹음 파일은 국민감정을 악화시키는 소재였고, 안종범 다이어리는 대통령의 범죄혐의를 옭아매는 데 결정적 증거로 사용됐다. 위기 상황을 극복해보려던 많은 사람의 노력은 ‘찻잔 속의 태풍’처럼 무력해졌다. 법률가들 중에서 ‘대통령에게 불리하게 돌아갈 것’이라고 점치는 사람이 늘어났다.
대통령은 사실 ‘최순실이 귀국해 검찰 수사에 협조하고, 청와대 수석과 3인방이 퇴진하면 수습 국면으로 접어들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 기대를 안고 2차 담화를 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검찰 수사를 통해 연일 최순실 비리혐의가 공개되자 일체의 수습 노력은 국민에게 전혀 공감을 주지 못했다. 수습 대책 중 대표적으로 먹혀들지 않았던 것은 임종룡 경제부총리 임명 건이었다. 금융위원장이었던 임 부총리 내정자는 전북 출신에 관료 사회뿐 아니라 정치권에서도 능력을 인정받고 있었으나, 당시 분위기에서 인사청문회를 통과할 수 없었다.
당당한 이미지 무너진 첫 사례
11월 중순으로 접어들면서 대통령은 말수가 줄어들었다. 대통령은 며칠간 침묵으로 대응했다. 참모들에게도 불필요한 발언을 자제하도록 당부했다. 대통령은 참모들에게 “팔랑팔랑대지 말고 중심을 잡고 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만큼 살얼음판 같은 상황의 연속이었다. 말 한마디가 살얼음판을 깰 수도 있었다. 참모들도 극도로 말조심을 했다. 실제 할 수 있는 말도 없었다. 검찰수사망은 조여오고, 여론의 반전은 없는 상태에서 청와대는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더구나 검찰의 대통령 조사 여부 때문에 다른 사안을 신경 쓰기도 어려웠다. 대통령은 조용히 검찰 조사에 대비했다. 최대 고민은 대통령이 직접 검찰조사를 받느냐 여부였다. 당초 청와대에서는 대통령의 검찰 조사를 수용해야 한다는 논리가 우세했다. 무엇보다 여론의 압박이 가장 컸다. 여론은 대통령이 조사받기를 요구했다. 또 2차 담화에서 검찰 수사에 협조하겠다고 약속해놓고 조사를 거부하기도 힘들었다. 검찰 조사는 무언의 당위론으로 받아들여졌다. 참모들도 대통령이 검찰 조사를 통해 의혹 내용을 제대로 반박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이 같은 당위론은 검찰 수사망이 구체적으로 조여들어오면서 달라지기 시작했다. 검찰 조사를 받는다고 해서 상황이 변하지 않으며 오히려 여론에 악재로 작용할 수 있다는 ‘불가론’으로 대체됐다. 또 이미 검찰이 각본을 세우고 수사하고 있는데, 대통령 조사가 무의미하다는 논리가 대두됐다. 이 때문에 검찰과 대통령 조사 시기와 방법을 두고 물밑 협상이 진행되다가 마지막에 결렬됐다. 검찰 조사를 받지 않게 된 것이다.
또 11월 17일 국회에서 ‘특검법’이 통과되면서 검찰 조사를 받기 어렵게 만든 측면도 있다. 검찰 조사만 받고 특검 조사를 거부하면 야당의 공세를 받게 될 텐데, 대통령이 연거푸 조사를 받아야 하는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검찰과 특검 모두 권력을 잃어가는 대통령을 대상으로 망신주기와 밀어붙이기용 수사를 벌일 수 있었다. 이 같은 대응 논의는 주로 법률가들을 통해 이뤄졌다. 법률적 대응에 정무적 참모들이 끼어들 여지가 많지 않았다. 대응의 주도권이 법률가들에게로 넘어가는 첫 번째 고비였다. 그리고 정무적 대응은 더더욱 꼬여갔다.
당시 대통령의 검찰 조사 논란은 3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대통령이 조사를 받지 않음으로써 대통령의 당당한 이미지가 무너진 첫 사례로 평가됐다. ‘약속의 정치인’ 이미지도 사라졌다. 대통령이 평생 축적해온 신뢰의 자산이 무너진 것이다. 국민에게 약속한 일이기도 했지만 실제 ‘대통령 신분인 상태에서 조사를 받는 게 그나마 낫지 않았느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당시만 해도 최순실 사건이 완벽한 실체를 드러내기 전이었기 때문에 조사를 통해 사건의 실체를 어느 정도 바꾸어 갈 수도 있었다고 본다. 한마디로 대통령 발언의 무게감이 그나마 살아 있을 때인 만큼, 조사를 통한 적극적 항변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면 검찰도 일방적으로 몰아가는 데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검찰 수사는 특검수사에 그대로 연결되기 때문에 검찰이 전체 수사 방향과 내용을 어떻게 설정하느냐는 아주 중요하다. 싸워볼 만한 여지가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지나놓고 보면, 조사를 받든 안 받든 달라지는 것은 없었겠다 싶다. 전체 흐름을 뒤바꾸는 데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대통령의 이미지를 생각한다면 조사를 받고 끝까지 당당하게 대응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크다.
유영하 변호사가 전면에 등장한 것도 이즈음이다. 대통령이 유영하를 개인 변호사로 선임한 것이 2016년 11월 15일경이다. 검찰은 11월 20일 중간수사결과를 발표했다. 검찰은 대통령을 최순실과 공모관계가 있다고 적시하고 피의자로 입건해 수사할 것이라고 밝혔다. 예상은 했지만 파장은 컸다. 대통령이 이제 범죄자 취급을 받게 된 것이다. 당시만 해도 삼성과의 뇌물죄는 인정되지 않았다. 주로 미르와 K스포츠재단과 관련된 혐의였다. 그럼에도 검찰 수사 결과 발표는 대통령 ‘탄핵 열차’가 9부 능선을 넘어가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본다.
유영하 변호사는 곧바로 반박 성명을 발표했다. ‘최순실이 유죄인 것이지, 대통령이 유죄라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는 논리였다. 검찰수사를 ‘환상의 집’ ‘사상누각’ 같은 표현으로 강하게 공격했다. 대통령과 검찰의 강한 대립은 많은 사람을 긴장시켰다. 둘 중에 하나가 패자가 돼야 하는 게임 같았다.
최재경 사퇴 발표 만류한 진짜 이유
최재경 민정수석은 당시 대통령이 가장 신뢰하고 의지하던 최고의 참모였다. 원만한 성격과 합리적 사고, 신중한 일처리가 돋보였다. 검찰에서도 후배들의 신망이 높았다. 우병우 전 수석의 후임으로 임명될 때 많은 사람의 기대를 모았다. 불행히 최재경의 청와대 재임기간은 너무나 짧았다. 10월 30일 수석에 임명됐는데, 한 달도 안 돼 사표를 제출한 것이다.
대통령은 11월 24일 오후 배성례 홍보수석에게 김현웅 법무부 장관과 함께 최재경의 사표 수리를 발표하라고 지시했다. 홍보수석이 발표를 하려는 순간, 나를 비롯한 홍보수석실 관계자들이 모두 막아섰다. ‘법무부 장관이라면 몰라도 민정수석의 사표 수리를 발표할 타이밍은 아니다’라고 반대논리를 폈다. 지금 최재경의 사표 수리를 발표하면, 적어도 언론에는 정부의 붕괴를 공식화하는 의미로 비칠 공산이 컸다. 최재경은 그만한 상징성을 갖고 있던 인물이다.
안 그래도 정부 부처들은 저마다 청와대와 관계를 끊고 독립적으로 움직이려고 하던 시점이었다. 이미 교육부가 청와대와 상의 없이 국정교과서 추진을 사실상 포기하는 언론플레이를 하고 있었다. 다른 부처들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속출하고 있다고 들었다.
언론에서도 청와대의 영(令)이 서지 않는다는 기사를 쏟아내고 있던 시점이다. 이런 기사들은 그래서 대통령 탄핵을 빨리 해야 한다는 논리로 이어졌다. 대통령에게 재고를 건의했다. 사표 수리의 연고를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지금 민정수석의 사표를 발표할 타이밍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타이밍의 문제였다.
고심 끝에 사표 수리 발표는 보류됐다. 나는 최재경 수석의 사표 반려를 주장했으나, 그것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보류로 절충됐다. 평소 말수가 많지 않던 한 수석도 나를 찾아와 “지금 민정수석이 물러나는 것은 절대 안 된다”며 각별히 걱정했던 기억이 난다.
최재경은 검찰 수사 발표에 대해 심적인 부담이 컸던 것으로 알려졌다. 평상시라면 민정수석을 정말 잘할 수 있는 카리스마와 캐릭터를 지녔지만, 당시 상황에서는 혼자 힘으로 감당하기 버거웠다. 민정수석으로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을 괴로워했고, 대통령에게도 항상 미안한 감정을 지녔던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일에 최선을 다하는 특유의 무한 책임감이 본인을 더욱 힘들게 했다. 또 대통령이 피의자로 규정된 상황에서 청와대 민정수석실 차원으로 보좌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점도 그만두려는 결심의 이유였던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향후 계속될 검찰과 특검 수사에 대비해 대통령을 제대로 도우려면 밖에서 도와야 한다는 취지였다. 문재인 대통령이 과거 민정수석을 그만두고 노무현 대통령 탄핵 변호를 진두지휘할 때와 마찬가지로 밖에 있어야 실제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최재경의 사표는 계속 보류되다가 12월 9일 국회 탄핵안이 의결되던 날 수리되고 후임에 조대환 민정수석이 임명됐다. 대통령의 마지막 인사결재였다. 최재경의 사표가 수리된 것은 어떻게 보면 대통령이 최재경을 계속 곁에 두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최재경이 민정수석의 족쇄를 벗고 자유롭게 법률적으로 도와줄 것을 기대했다. 실제 최재경은 수석을 그만두고 헌법재판소에서 탄핵 재판 심리가 이어질 때 물밑에서 대통령 변호를 성심성의껏 도왔다. 그 과정에서 유난히 마음고생이 많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참으로 묵묵히 헌신했던 분으로 기억한다.
트럼프 대통령당선인이 처음 통화한 정상
대통령은 11월 모든 행사를 중단한 상태였다. 이미 JTBC 보도가 난 10월 말부터 대통령의 공식행사는 중단됐다. 국민의 여론이 좋지 않다는 점도 있었지만, 각종 안전사고의 우려도 있었다. 대통령은 11월 동안 카자흐스탄 대통령의 국빈방한 행사만은 예정대로 치렀다. 그게 11월 10일이었다. 이것은 국가 간의 약속인 만큼 지키지 않을 방법이 없었다. 또 신임 주한대사 신임장 제정식도 예정대로 치렀다. 이 두 가지 외교 행사 외에는 모든 공식 일정이 취소됐다.
그렇지만 11월에 가장 중요한 대외변수는 미국 대선이었다. 대통령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당선이 한반도 정세에 미칠 영향 등에 대해 철저하게 대비하기를 바랐다. ‘아메리칸 퍼스트’를 외치는 트럼프가 당선되면 한국에 대해서도 ‘압박’을 가할 것이라는 예상이 많았다. 트럼프의 당선은 우리 시각으로 11월 9일 오후에 결정됐다. 대통령은 관련 뉴스와 보고를 받으면서 한국이 주도적으로 미국의 새 대통령과 협력해야 한다는 점을 무겁게 생각했다. 청와대는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회 회의를 열어 미국의 대선 결과 이후의 상황을 점검했다.
박 대통령과 트럼프 당선자의 통화도 곧바로 연결됐다. 당선 발표 다음 날인 10일 오전 대통령은 트럼트 당선자와 전화 통화를 하고 한미동맹과 방위공약을 재확인했다. 미 대통령 당선자 트럼프가 한 정상 간 통화로는 가장 빠른 통화였다. 대통령 처지에서도 모처럼 대통령으로서의 정상적인 업무를 한 것이었다. 트럼프는 “한국을 방어하기 위해 굳건하고 강력한 방위 태세를 유지할 것”이라며 “흔들리지 않고 한국과 미국의 안전을 위해 끝까지 함께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대통령은 11월 비공식 일정으로 트럼프 대통령의 측근으로 알려진 에드윈 퓰너 전 헤리티지재단 이사장과 면담하면서 트럼프 당선 이후 한미 관계의 지속성과 한미동맹의 중요성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그만큼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조태용 청와대 안보실 차장은 15일 트럼프 대통령 당선자 측과 협력을 위해 지체 없이 미국을 방문했다. 외교 안보 분야만큼은 청와대에서 공백이 없어야 한다는 강력한 메시지였다. 시간이 허락돼 대통령이 트럼프와 협력할 수 있었다면, 한반도의 흐름도 아주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김정은이 훨씬 저자세로 미국과 한국에 협력하면서 ‘힘을 통한 평화 모드’가 한반도에 나타났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북한 문제 해결에 공들였던 대통령의 수많은 시간을 기억하기에 임기 단축은 더욱 더 안타까운 일로 느껴진다.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이 체결된 것도 11월이었다. 당시 민주당은 강력 반대했지만, 그 때 체결된 협정은 문재인 정부 들어서도 폐기되지 않은 채 계속 이어지고 있다.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은 한국에 유리한 협정이다. 대북 군사정보와 관련해서 위성을 이용한 일본 측 정보가 많고, 우리는 이를 공유할 수 있다. 미국이 권유하고 있고, 공유하는 정보도 많은 만큼 당연히 한일간에 협정을 통해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
이 협정은 어디까지나 핵과 미사일 관련 정보를 절차에 따라 주고받기 위한 보호협정이다. 정보를 공유하기 위한 기본 절차 협정이다. 정보 공유가 목적인 게 아니라 정보공유 프로토콜이 협정의 핵심이다. 이 협정은 국무회의를 거치도록 돼 있으며, 대통령의 관심이 증폭돼 있다는 점을 감안해 최대한 ‘로 키(low key·이목을 끌지 않고 조용히)’로 추진되었다, 대통령은 정치적 연관이 없다면 효율적으로 진행되기를 원했다.
“국정 공백이 없도록 해달라”는 당부
대통령은 검찰수사 결과 발표를 며칠 앞둔 험악한 상황에서도 수석들에게 “국정 공백이 없도록 해달라”는 말을 몇 번이나 당부했다. 국회에서 탄핵소추 의결이 있기 직전까지도 그랬다.
물론 그 시절에 그런 게 무슨 소용이 있었느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탄핵을 당하지 않도록 하는 데 주력해야지 국정 운영에 미련을 갖는 게 무슨 의미냐는 회한이다. 앞서 설명한 대로 각 부처는 이미 청와대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있었고, 독자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미 박근혜 정부를 떠받들고 있던 벽돌들은 하나둘 떨어져 가고 있었다. 이와 함께 탄핵 시계는 째깍째깍 대통령을 압박하고 있었다. 그렇게 11월 말이 다가오고 있었다. 11월 말과 12월 초는 국회 탄핵표결을 앞둔 마지막 운명의 시간이었다.
제1부 ‘폭풍의 서막’ 독자 반응을 보면서…
“역사는 용기 있을 때 기록될 뿐”
박근혜 정부의 마지막 140일에 대한 기록이 ‘신동아’ 6월호를 통해 게재되면서 다양한 반응이 쏟아졌다. 의외로 많은 분이 읽어주셨고 격려해주셔서 감사드린다. 특히 30, 40대 독자가 많았던 점은 신기했고 놀라운 경험이었다. 박근혜 정부를 소재로 한 글도 ‘욕’을 먹지 않고 대중에게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일종의 금서(禁書)가 풀린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민감한 내용들이 포함돼 있어 필자로서는 여전히 조심스럽고 걱정스럽다. 혹시 내 글로 불편한 분들이 생기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으나, 일부 불편함을 제기한 분들도 있었다.
이들은 대통령과 관련된 너무 디테일한 내용에 일단 본능적인 불편함을 호소했다. 특히 박 대통령이 윤전추 대통령비서실 제2부속실 행정관 앞에서 눈물을 보인 대목에 대해 마음이 편치 않았다고 했다. 대통령을 너무 ’울보 대통령‘으로 만들었다고 했다. 박 대통령의 단호하고 강인한 본래의 이미지와도 맞지 않다는 것이다. 맞는 반론이다.
다만 지난 첫 회의 글은 기나긴 연재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최순실 사태에 따른 언론 보도가 집중된 2016년 10월 말과 11월 초의 이야기다. 약 열흘간의 미세한 기록이다.
대통령은 그 이후로 눈물을 보인 적이 거의 없다. 초창기 당혹스러웠고 비참했던 심경을 눈물로 표출했고, 그 시기도 열흘 정도에 불과했다. 1부 연재가 그 시기에 집중되다 보니 나타난 착시현상이라고 본다. 코끼리 다리 만지듯 대통령의 순간 이미지를 곡해해서 받아들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울보 대통령’ 만들었다는 비판
그러나 눈물은 약함의 표시이기도 하지만, 마음을 다잡는 결의의 심경을 나타내기도 한다고 본다. 대통령은 눈물 때문에 판단을 유보하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그건 대통령 심경의 일단일 뿐이고, 오히려 이를 악물고 당시 상황을 바로잡아보고자 노력했다고 기억한다.
물론 독자 대부분은 균형감 있게 당시 상황을 이해했으며, 도움이 됐다는 반응을 주었다. 이 연재를 부분으로서가 아니라 전체로서 보게 된다면, 연재가 특별히 일부를 곡해하거나 무리하게 부각하는 등의 불편부당한 개인적, 정치적 의도를 갖고 쓰지 않았음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일부 사적인 에피소드를 소개할 수 있었던 것도 대통령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비서에게 평등하고 인간적으로 대했기 때문이다. 각자가 선호하는 이미지만으로 박 대통령에 대한 기억을 유지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런 확증편향이 올바른 것은 아니다. 이 글은 가능한 한 박 대통령의 전체 모습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고자 했으며, 그래야 역사 속에서 대통령을 올바로 자리매김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나는 과거 대통령 관련 책을 저술하면서 2006년 커터 칼 사건(2006년 5월 20일 오후 7시 15분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서울 신촌 현대백화점 앞에서 오세훈 서울시장 후보 지원유세에 참가하던 도중 괴한에게 커터 칼로 얼굴을 피습당한 사건) 당시 수술을 받으면서 박 대통령이 의사에게 “내 속살을 본 첫 남자예요”라고 말했다는 에피소드를 서술했다. 박 대통령과 관련한 글을 너무 옐로페이퍼처럼 기술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대통령의 모습을 가감 없이 표현하려 했을 뿐이다.
필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글이 반대 세력이나 특정 정치꾼들에 의해 악용될 우려는 상존한다. 그런 염려가 많이 전달돼왔다. 여전히 많은 사람이 재판이나 수사를 받고 있는 상황이어서 신경이 쓰인다. 반대파에게 공격의 빌미를 주는 것도 문제이지만, 우군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파벌로 쪼개져 ‘총싸움’을 벌이는데 활용되는 최악의 상황도 염려스럽다. 최대한 불편한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는 말씀 외에 더 드릴 말이 없다.
또 하나. 당시 상황을 전달하다 보니 불가피하게 이름을 쓰게 된 윤전추 행정관 등 몇몇 분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 모든 사람의 기억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가물가물해지기 때문에 일부는 헷갈리거나 달라질 수 있다고 본다. 그래서 기억에 의존하는 글은 항상 조심스럽다. 독자들이 감안해서 해석하리라 생각한다.
떠올리기 싫은 고통의 작업
글을 쓰면서 불필요한 호칭을 생략하는 경우가 많다. 가령 정호성 전 대통령비서실 제1부속비서관의 경우에도 직책을 생략한 채 ‘정호성’이라고 적었다. 모든 등장인물에 이 같은 원칙을 적용하다 보니 일부 불쾌하게 생각하는 분도 있었다. 독자의 편안한 읽기를 배려한 나의 글쓰기 습관에서 비롯된 일로 이해해주길 바란다.
연재가 시작되자 마자 한 시사주간지는 박 전 대통령과 최순실, 정호성의 대화 녹취록을 공개했다. 연재 다음 날 공개돼 다양한 억측이 제기됐다. 그 녹음은 이미 검찰에 압수될 당시부터 논란이 됐던 것이고 내용도 어느 정도 공개됐던 것이어서 새로운 것은 없다. 녹음 내용에 대해 책임 있게 해명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지만, 지난번과 이번 연재에 녹취록을 있는 그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내 나름의 분석을 했음을 밝힌다.
이 모든 게 결국 떠올리기 싫은 기억을 다시 하게 되는 고통의 작업이라는 점이 가장 큰 문제다. 일부는 필자가 이 고통의 기억을 끄집어냈다고 원망하는 사람도 있다.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는 것이다. 그것만은 교정하고 싶다.
역사는 싫든 좋든 승자의 기록이다. 박근혜 정부의 기록은 먼 훗날 다시 발굴되지 않는다. 좌파는 짓밟을 것이고 우파는 외면할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역사는 승자들에 의해 편집돼, 박근혜 정부는 역사 서술에서 아예 삭제될지 모른다. 모든 국민이 떠올리기 싫어하는 역사가 될 수도 있다. 더구나 항변의 기록은 하나도 없다. 아무도 쓰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 세월호가 그렇고 탄핵이 그렇다. 정무적이고 법률적인 투쟁뿐 아니라 역사전쟁에서도 이미 지고 있고, 격랑에 휩쓸려갈 뿐이다. 2년 전에도 기다리라는 말만 반복했듯이, 지금도 무엇을 기다릴 것인지, 기다린 후에는 무엇이 올 것인지 알지 못한다. 기대와 달리 박 전 대통령에게 내년은 올해보다 더 좋지 않을 수 있고, 내후년은 더 최악일 수 있다. 가만히 있어 좋아질 수는 없다. 향후에는 재판 기록이 공개되면서 지금보다도 훨씬 심한 역사 지우기가 있을 것이다.
“역사의 우회로는 없다”
그럼 역사는 언제 기록되는가. 타이밍이 따로 없다. 용기가 있을 때 기록될 뿐이다. 또 기록할 사람이 있으면 하는 것이다. 때가 지나면 ‘흑역사’만 남는다. 역사는 ‘전두환 정권에서 연 10%씩의 경제성장을 기록했다’는 성공은 기억해주지 않는다. 역사전쟁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은 잊히거나 버림받거나 둘 중 하나일 뿐이다. 로마 역사에서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이후 서로마제국 멸망까지 약 300년간 측근인 근위대에 의해 퇴출되거나 목숨을 잃은 수많은 황제가 있었다. 그들 중 선정을 베푼 군주가 있었지만, 누구도 나중에 유능한 황제로 다시 기록된 역사는 없다. 역사의 우회로는 없다. 역사의 공간에 숨 쉴 수 있는 조그만 생태 공간이라도 만들고 싶어 하는 노력의 일환이란 점을 이해해주길 바란다.
전 대통령비서실 홍보기획비서관·계명대 초빙교수 youngsikchun@gmail.com
● 참모들 “최순실이 관저에서 자고 갔습니까”
● 朴 “구차하다” “구질구질하다” “찌글찌글하다”
● ‘박근혜 싸이월드’ 오픈하면서 점수 딴 최순실
● ‘김병준 총리 카드’ 잃은 건 대통령과 참모의 실기 때문
● 朴 태블릿 보도 후 “모두 흥분하는데 무슨 말인들 의미가 있겠나”
● 朴은 형제 빼고는 반말 안 써, 崔와 참모에게도 “예” “예”
● 건강상 이유로 간호장교에게 비타민 주사, 영양 주사 등 자주 맞아
● 최재경 민정수석 사퇴 진짜 이유…밖에서 제대로 돕기 위한 것
2016년 11월 29일 3차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고 퇴장하는 박근혜 당시 대통령. [청와대사진기자단]
돌이켜보면, 최순실 사태는 필요 이상으로 증폭됐다. 최순실의 국정농단이라고 하지만, 과거 권력형 비리와 달랐고, 재임 중 형사불소추 특권(대통령은 재직 중 내란 또는 외환죄가 아니면 형사소추할 수 없는 특권)을 가진 대통령을 수사하고, 수사도 끝내기 전에 결국 탄핵할 정도였는지에 대해선 끊임없는 논란을 야기시키고 있다. 국민정서법상 얘기하자면, 당시 박근혜 대통령의 잘못은 최순실이라는 사람을 너무 꽁꽁 숨겨놓은 데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사연이 제대로 해명되지 않았다. 박 대통령도 최순실의 행각에 대해 전부 알지 못하고 연일 놀라는 중이었던 만큼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가짜뉴스인지 분간해내기 어려웠다.
최순실 꽁꽁 숨겨놓은 게 잘못
이 때문인지 대통령은 최순실과 관련한 해명에 신중했고, 소극적이라는 느낌을 줄 때가 많았다. 배신감을 표시하거나 눈물을 흘린 것도 일부 참모들에게나 보인 것이지, 일반인은 전혀 알지 못한다. 억울해하면서도 최대한 말을 아꼈다. 심지어 말문을 닫은 것처럼 비쳤다. 이것은 대통령에게 결정적으로 불리하게 작용했다.
오랜 친분 관계였기에 이렇다 저렇다 말하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웠을 수 있고, 최순실과 ‘네 탓 공방’으로 번지는 상황을 우려했을지도 모른다. 2차 담화에서 표현했듯 ‘가장 어려울 때 도움을 준 사람’인데 비난하기 어려웠다고도 생각한다. 대통령이 안고 가야 할 숙제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아니면 어떻게 규정해야 할지 정확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을 수도 있다. 대통령의 조심스러운 마음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숯덩이처럼 타들어갔을 그 속을 누가 다 이해할 수 있겠는가. 대통령은 원래 가까운 사람에게조차 속마음을 잘 얘기하지 않는 스타일이다.
박근혜 정부 초대 총리인 정홍원 전 총리는 2019년 2월 조선일보와 인터뷰하면서 대통령이 최순실 이야기를 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자기가 어려울 때 심부름하고 도와주던 사람인데, 누워서 침 뱉기라고, 윗사람으로서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면서 “자신을 더 치사한 사람으로 만든다고 생각한 것 아닌가 싶다”고 분석했다.
그래도 최순실 사건이 터졌을 당시의 참모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자를 건 자르고, 공세를 취할 건 공세를 취할 수 있었다고 본다. 그랬다면 사태가 이렇게까지 악화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후회할 수밖에 없다. 2016년 11월 한 달 동안은 최순실에 대해 너무 우물쭈물하다가 만신창이가 돼버린 측면이 강하다.
이렇게 된 배경에는 대통령을 가까이에서 보좌한 ‘3인방’(정호성, 이재만, 안봉근)을 대신할 세력의 부재 탓도 있다. 3인방이 부정적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정작 어려운 시기에는 필요했다. 위기의 순간에는 대통령을 잘 이해하는 참모가 수습에 나설 수밖에 없는데, 그런 구조가 깨진 것이다.
이런 중간 통로의 부재로 모든 판단과 결정은 대통령에게로 쏠릴 수밖에 없었다. 대통령의 분명하지 못한 상황 대처로 오해가 쌓여갈 때, 언론은 청와대에 들어간 침대 개수와 비아그라 등을 운운하며 비정상적 지도자로 몰고 갔다. 답답해서 대통령에게 불쑥 물어본 적이 있다.
“대통령님, 최순실이 관저에서 자고 갔습니까 아닙니까? 말씀을 안 하시니 쓸데없는 오해가 공연히 확산되고 있습니다.”
朴 “찌글찌글하게 하지 않겠다”
최순실이 2017년 8월 29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국정농단 관련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뉴시스]
참모들도 최순실이 역할과 행세를 어느 정도 했는지 궁금했다. 대통령은 말이 없었다. 나중에 보니 최순실은 관저에서 자고 간 적이 없었다. 그런데 대통령은 최순실과 개인 친분에 관한 이 같은 악성 뉴스에 대해 일일이 대꾸하는 게 구차하다고 느꼈던 것이다. 홍보수석실에서 확인이 잘 되지 않아 엉거주춤 있다 보면 이 같은 악성 뉴스는 반나절 사이에 완전히 진짜 뉴스가 돼서 민심을 악화시키고 있었다. 해명할 때쯤 되면 이미 늦었다. 원인이 어찌 됐건 수많은 오보에 대해 뾰족한 대응 방법을 찾지 못한 탓에, 박근혜 정부의 홍보 기능은 왜 그리 무기력했느냐는 비판을 두고두고 받고 있다. 이 모든 게 2016년 11월 초의 상황이다.
박 대통령은 이때쯤 “구차하다”는 말을 부쩍 자주 입에 올렸다. 대통령이 자주 쓴 단어는 “구차하다”와 “구질구질하다”이다. 둘 다 비슷한 어감을 갖고 있다.
대통령이 그런 단어를 쓸 때마다 참모들은 대통령에 대한 일종의 ‘추궁’을 멈췄다. ‘여성으로서, 인간으로서 얼마나 비참하고 구차했으면 저런 말을 할까’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대통령의 마음을 받아들였다.
물론 더 비참하고 구차한 일이 생길 것이라고 예상은 됐지만, 차마 더 진도를 내기는 어려웠다. 직무 정지 후 대통령이 관저에서 변호인을 만날 때도 “구차하게 하지 않겠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고 한다. 한번은 대통령이 “찌글찌글하게 하지 않겠다”는 표현을 사용해 참모들이 놀란 적이 있다.
나중에 대통령과 대화를 나누게 됐을 때 초창기 대응 실패 이유를 물었다. 대통령은 “초창기에 좀 더 적극적으로 대응했으면, 일이 이만큼 커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통령은 상황을 충분히 이해했다. 여기서 초창기란 2016년 10월 24일 최순실 태블릿 PC 관련 JTBC 보도가 나온 때부터 12월 9일 국회에서 탄핵소추 가결까지, 즉 10월 말에서 12월 초까지 한 달 반 동안의 시기를 말한다. 이것을 대통령 운명의 ‘골든타임’이라고 하고 싶다.
“그때는 광풍이었습니다. 누구도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단두대가 나오고, 모두 흥분 상태였습니다. 태블릿PC 보도가 나온 다음 언론 보도를 모두 사실로 알고 흥분하는데, 무슨 얘기를 한들 의미가 있었겠습니까. 어떤 얘기도 통할 수 없었습니다.”
대통령은 무기력을 호소했다. 대통령은 또 “결국 언론, 국회와 싸우게 됐는데…내가 무능하다고 생각합니다”라고 자책했다.
그 광풍의 시대, 미주알고주알 해명하는 것이 본인을 더 구차하게 만든다고 생각한 것이다.
운명이었을까. 대통령은 역사상 가장 구차한 수렁으로 점점 빠져들었다.
삼성동에서 음식 준비하던 사람
계영배(왼쪽)와 박근혜 전 대통령의 서울 강남구 삼성동 옛 자택. [동아DB]
박 대통령이 공개한 대로 최순실과의 관계는 오래됐다. 주변인들에 따르면, 최씨 집안 가족들은 대통령이 아버지를 잃고 오갈 데 없던 시절, 믿었던 사람들에게 배신감을 느끼며 힘들어하던 시절에 의지했던 사람들이다. 가장 힘든 시기를 같이했기에 이들에 대한 신뢰가 컸던 것 같다. 또 여러 얘기를 종합했을 때, 원래 언니 최순득이 대통령과 친했고, 뒤이어 최순실이 더 가까워졌다. 대통령은 최순득과 가까웠던 시절이라 하더라도 적어도 국회의원이 된 후에는 그의 집에 간 적이 없는 것으로 주변 사람들은 기억하고 있다.
일부 보도에 나온 대로 2004년 대통령이 삼성동 자택을 개방했을 때 최순실이 집에 있었다. 음식 준비 등을 하며 ‘기자 맞이’를 같이했다. 대통령은 당 대표를 맡으면서 처음으로 삼성동 자택을 개방했다. 필자인 나도 당시 기자 시절이어서 삼성동 자택을 방문해 식사를 같이 했지만, 최순실이라는 존재를 알지는 못했다. 음식 준비를 도와주던 여성이 몇 명 보였지만, 그 사람들에 대해 누구도 관심을 갖지는 않았다.
대통령은 당시 방문한 기자들에게 계영배(戒盈杯)를 통해 술을 직접 따라줬다. 2층 침실을 안내하면서 피아노를 직접 연주하는 등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삼성동 자택 개방 기사는 대부분 언론에서 아주 호의적으로 보도했다. 특히 계영배는 잔의 7할이 되면 밑으로 흘러내려 ‘넘침을 경계하는 잔’으로 알려졌고, 박근혜 대표의 상징 같은 잔이었다. 평생을 절제하면서 살아온 삶을 표현하고 있었다. 계영배를 타고 흘러내렸던 삼성동 자택 개방의 그 아련한 절제의 추억은 그곳에 있었던 주목받지 못하던 한 사람에 의해 10여 년 뒤 많은 사람에게 배신과 비수로 되돌아온 셈이다.
관계자들에 따르면, 최순실은 처음엔 남편 정윤회를 대통령에게 소개하면서 직접 나서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조금씩 업무와 연결됐다.
비서들에게도 “예, 예”
다수의 증언에 따르면, 최순실이 대통령과 업무로 맺어진 계기는 2002년 미니 홈피 ‘싸이월드’ 오픈으로 보인다. 당시 유치원을 운영하던 최순실은 유치원 홈페이지 개설을 하면서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 눈을 뜨게 됐다. 그러면서 대통령에게도 미니 홈피 아이디어를 냈다는 것이다. 대통령은 당시 미니 홈피로 큰 인기를 누린 바 있다. 최순실은 조카들로부터 그 아이디어를 얻은 것으로 알려졌다. 어쨌거나 이 아이디어를 최순실이 주도하면서 대통령의 점수를 크게 따게 됐다고 한다.
정윤회라는 존재가 사라진 것도 결과적으로 최순실에게는 독이 됐다고 할 수 있다. 정윤회가 있었으면 최순실의 행태가 상당 부분 제어됐을 건데 유일한 견제 세력이 사라지면서 최순실의 폭주가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정윤회가 한번은 “집사람이 아직도 대통령을 돕고 있느냐”는 취지로 놀라워한 적이 있다고 한다. 최순실은 이혼 후 거스를 게 없는 듯 행동했다.
그렇다면 최순실은 어떤 재주를 지녔기에 대통령 곁에 오래 머물 수 있었을까. 관련자들에 따르면, 최순실은 오랜 시간을 대통령과 가깝게 지내왔기 때문에 대통령의 개인 성향을 너무 잘 파악하고 있었다. 특히 의상에서는 기가 막히게 대통령 취향을 알아냈다고 한다. 대통령이 좋아하는 디자인이나 컬러 등을 최순실은 귀신처럼 맞춰냈다. 행사 성격에 따라 디자인과 색깔을 조정하는 능력도 있었다. 국군의 날에는 감색 옷을, 중국 방문 시에는 중국과의 관계를 고려해 의상을 선택했다. 이런 능력이 대통령의 취향에 잘 맞아떨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대통령은 본인의 옷을 직접 선택한다. 차이나 스타일 옷도 20여 년 전 대통령이 디자인해서 만들어낸 옷이다. 대통령은 필요할 때마다 직접 디자인한 옷 그림을 의상디자이너에게 전달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최순실이 이 같은 대통령의 취향을 파악하고 있었던 것은, 그의 생존 본능의 발로였던 것으로 보인다. 대통령이 최순실에게 공손하게 응대한다는 점을 의아하게 생각하는 일부 기사가 나왔다. 특히 어떻게 된 일인지 국정농단 수사 과정에서 법적으로 유출하지 못하게 돼 있는 압수 파일이 통째로 언론에 유출·공개되면서 대통령이 유독 최순실에게만 공손했던 것처럼 곡해되기도 했다. 이 녹음 파일은 정호성이 취임사 작성에 참고하기 위해 대통령과 최순실 등과 나눈 대화를 녹음한 것이었다.
어찌 됐건 대통령과 대화를 나눠본 사람이라면 그 대화 스타일을 대체로 이해하게 된다. 대통령은 누구와 대화하더라도 상대방 말을 잘 자르지 않는다. 대통령은 상대방의 말에 수긍하면 “예 예” 하며 반응하고, 말이 맘에 들지 않으면 대답을 하지 않는다. 가까운 의원들과 대화할 때도 대통령 앞에서 자기들끼리 논쟁하기도 하지만, 대통령이 적극적으로 끼어들지는 않는다고 한다. 꼭 필요한 말만 할 뿐이다.
아랫사람이나 비서들에게도 반말을 하지 않다 보니, 자연히 “예, 예”라는 표현이 잦을 수밖에 없다. 대통령과 대화하다 보면, 깍듯하게 응대를 받는 순간 참모들이 오히려 어색하게 느끼는 경우도 많다. 그냥 남들처럼 반말로 지시하면 비서 입장에서 더 편할 것 같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대통령의 어법은 한국적 상하 관계에는 잘 맞지 않는다. 한국 사회에서 아랫사람에 대한 지나친 공대는 오히려 장벽의 일부로 해석될 수 있다. 하여간 관련자들에 따르면, 지구상에서 대통령이 반말을 하는 대상은 두 동생인 박근령, 박지만과 조카들뿐이라고 한다. 그것은 호불호의 문제가 아니라 평생을 유지해온 대통령의 스타일일 뿐이다.
崔, 대통령 있을 때와 없을 때 행동 달라
최순실 씨 측근으로 알려진 고영태 씨가 2016년 10월 31일 서울중앙지검에서 조사를 마친 뒤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있다. [뉴시스]
말투와 상관없이 대화 내용은 일률적으로 정의하기 어렵다. 대통령은 대체로 수석들에게는 엄격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대통령은 가깝게 느끼는 수석들에게 주로 전화로 업무 지시를 하면서 30분이나 1시간씩 대화하는 경우가 있다. 이때 수석들의 견해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화를 내거나 높은 톤으로 지시한다. 수석들 가운데 일부는 이 때문에 대통령의 전화가 두렵다고 하는 경우도 있었다. 대통령은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적절한 방식으로 대화를 나눈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다시 최순실의 행적에 대한 분석으로 돌아간다면, 문제는 최순실의 이중적 행태가 대형 사고를 쳤다고 볼 수 있다. 최순실을 알고 지낸 청와대 인사들에 따르면 최순실은 대통령 앞과 그렇지 않은 경우의 행동이 달랐다.
말투에서부터 차이가 났다. 대통령 앞에서는 조신한 척 “네, 네”라는 말투를 사용했다. 대통령이 없는 장소에서는 쌍스러운 말을 남발했다고 한다. 최순실은 대통령 앞에서 대통령비서들에게 반말을 하지 않았다. 대통령만 없으면 “이렇게 해”라며 반말을 했고 자기과시도 일삼았다고 한다. 청와대 들어올 때 최순실은 주변에 들으라는 듯 “(대통령이) 또 들어오라 그러네”라며 자기과시를 했다는 것이다.
특히 최순실이 대통령 앞에서는 사심 없이 일하는 것처럼 포장하고, 조심하며 보안을 중시하는 사람처럼 언행을 했다는 점은 최순실 사건 발생 후 주변 사람들을 깊은 배신감으로 몰아갔다. 주변인들에 따르면 최순실은 툭하면 ‘보안’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면서, 정작 본인은 고영태 씨등에게 행적을 남기고 다닌 것으로 나타났다. 더구나 고영태 일당과 사익을 꾀하고 여기저기 ‘갑(甲)질’로 비치는 행동을 하면서 인심을 잃다가 사이가 틀어져, 그들이 언론에 제보하면서 이 같은 결과까지 오게 된 것이다. 고영태 일당을 비롯해 최순실 주변에서 일을 했던 사람들이 모두 최순실을 배반한 것을 보아도 최순실의 인간 됨됨이에는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거기에 각종 오보와 추측성 기사가 쏟아져 국민 여론에 기름을 부었고, 최순실 사건은 역사상 최악의 비리사건으로 둔갑한 것이다.
어쨌든 이 같은 최순실의 행실을 대통령이 전혀 알지 못했다고 주변 사람들은 증언하고 있다. 물론 태도가 나쁜 것이 비리와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최순실 사건의 경우 복기해볼 때 결국 나쁜 행실이 비리로 이어지는 데 일정 정도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사람을 곁에 두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대통령도 비난을 당하게 된 것이라고 본다. 나는 대통령이 2016년 11월 4일 2차 담화에서 최순실 사건에 충격을 받아 “이미 마음으로는 모든 인연을 끊었지만, 앞으로 사사로운 인연을 완전히 끊고 살겠다”고 말했을 때 가슴이 먹먹했다. 당연히 필요한 발표였으나 ‘인간 박근혜’의 측면에서는 그나마 몇 명 없는 사적인 관계가 완전히 끊기게 되고, 대통령은 그야말로 사적 영역을 거세당하는 절대 고독의 존재가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최순실의 비리 의혹이 연일 이어지는 가운데 청와대는 2차 담화를 앞둔 11월 2일 김병준 씨를 새 총리로 내정했다는 발표를 했다. ‘김병준 카드’가 성공하고 담화가 약발을 거두었다면 대통령은 위기에서 극적으로 살아났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낱같은 희망을 안고 살던 시기였다.
전날인 11월 1일 오후 대통령을 집무실에서 만났을 때, 김병준 카드를 미리 알고 있었으므로, “정말 최선의 선택인 것 같다”고 대통령에게 말했다. 그 다음 ‘비서실장만 잘 임명하면, 인사를 통해 어느 정도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안철수 끌어안을 카드
2016년 11월 2일 김병준 국무총리 내정자가 서울 통의동 금융감독원 연수원 로비에서 소감을 말하고 있다. [동아DB]
나는 대통령이 묻지 않았지만 이원종 대통령비서실장 후임에 대한 의견을 과감히 개진했다. 야당의 협조를 기대해야 하는 만큼 “김대중·노무현 정부 인물 중에 괜찮은 사람을 선택하는 게 현 국면에서 최선인 것 같다”고 직설적으로 말했다. ‘한시가 급한데 대통령의 눈치만 보고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실 후임 비서실장의 경우 대통령은 이미 민주당 출신의 한광옥 국민대통합위원장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공교롭게 생각이 엇비슷하게 된 셈이다. 그땐 대통령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김병준 카드는 야당을 배려한 인선이었다. 노무현 정부의 정책실장이었던 데다 안철수 국민의당 의원으로부터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영입 제안을 받고 있었던 만큼 야당과 통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최소한 안철수를 끌어안을 수 있는 카드였다.
김병준의 사고방식은 자유주의에 기반한 보수 성향이면서도, 특별히 이념지향적 스타일이 아니었다. 본인 스스로가 이념지향성을 거부해왔다. 국가관의 중심이 잡힌 반면 이념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매력적인 카드였다’고 생각했다. 대통령이 위기였으니 발탁한 인사였지, 평상시라면 힘들었을 것이다. 손학규 현 바른미래당 대표도 당시 물망에 올랐지만, 김병준이 연착륙할 수 있는 카드라고 봤다.
김병준은 ‘대통령 권력’이라는 저서에서 박근혜 정부 총리 후보 지명을 수락한 이유와 관련, “저급한 진영논리, 이를 기반으로 분노를 부추기고 선동을 일삼는 천박한 정치…세월은 갔지만 돌고 돌아 모든 게 다시 그대로 있다…탄핵하건 하야를 시키건 국정은 국정대로 챙길 총리 하나 추천하지 못하는 정치를 계속하고 있다”고 적었다. ‘진영논리를 극복하고 누군가 국정을 챙겨야 한다는 점에서 총리직 제안을 수락했다’는 뜻으로 읽혔다.
야당(민주당)에 국무총리를 추천하라고 했더라도 김병준 이상을 추천하지 못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실제 나중에 야당에 총리 추천권을 넘겼을 때 야당은 총리후보를 추천하지 못했다. 겉으로는 가라앉는 정권에 협조할 수 없다는 논리였지만, 실제론 김병준 이상의 카드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야당은 그러면서 총리 추천 대신 탄핵 추진을 하겠다고 말을 돌려버렸다. 김병준의 말대로 야당은 진영 정치를 택했다.
누굴 임명해도 반대할 분위기
김병준 카드는 시작부터 삐걱거렸다. 우선 발표 전에 야당에 동의를 구하는 절차를 제대로 밟지 않았다. 야당에 귀띔이라도 해줬으면 나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대통령의 보좌 기능이 구멍난 데서 비롯된 일로 해명됐다.
그래도 통보 이상의 조치는 어려웠다. 야당과 흥정했으면 어느 세월에 새로운 총리를 뽑을 수 있었겠는가. 당시 상황이 야당과 협의한다고 될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야당은 이미 박근혜 정부에 ‘KO승’을 자신하며, 수많은 KO 펀치를 날리고 있던 상황이다. 굳이 박근혜 정부에 협조해서 시간을 벌어줄 생각이 없었다. 야당은 총리로 누굴 임명해도 반대하고 나설 분위기였다.
야당은 자신들이 수용할 수 있는 중도적 인물이라면 대승적으로 협조해줬어야 한다. 야당도 처음에 크게 반대하지 않다가 촛불 여론을 의식해 비난 대열에 합류했다.
김병준 총리 내정자는 참으로 감각이 빠른 분이었다. 상황이 녹록지 않다는 점을 깨닫는 순간, ‘개인기’로 상황을 뚫기 위해 노력했다. 김 총리 내정자는 “경제·사회 분야에서 전권을 행사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런데 돌발 사고는 11월 4일 대통령의 대국민담화 때 김 총리 내정자 언급이 빠지면서 빚어졌다. 언론은 김 총리 내정자가 전권을 충분히 확보받지 못한 것이라고 틈새를 후벼팠다. 부주의한 탓이지만 결과적으로 대통령이 틈새를 허용한 셈이다.
여기에다 청와대가 김 총리 내정자를 지원사격하는 데 적극적이지 못했다. 당시 언론은 ‘외치(外治) 박근혜, 내치(內治) 김병준’을 쓰면서 김 총리 내정자의 권한 확대를 기정사실화했다. 이것은 “경제·사회 분야에서 전권을 행사한다”는 논리에서 한발 더 나아간 것이었다.
“내치 전권 준다”고 했어야
그러나 내·외치 구분이 모호하고 헌법상 이 같은 분할통치는 불가능했다. 1년 반 뒤 문재인 정부도 헌법 개정을 추진하면서 실제적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국회 추천 총리를 수용하지 않았다. 같은 논리와 맥락이다. 문재인 정부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내용을, 당시 언론은 당연한 듯 밀어붙이고 있었다. 언론은 이원집정부제 같은 권력 형태를 기정사실화했다.
언론이 대통령과 김병준의 틈새를 벌리던 5일과 6일 이틀 동안 청와대는 수습을 하지 못했다. 수세에 몰린 청와대로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실기(失期)한 것이다.
뒤늦게 7일 홍보수석이 기자들에게 김병준 총리 내정자에게 ‘막강한 권한’을 준다는 애매모호한 논리를 폈으나 먹혀들지 않았다. 이때 그냥 논리적으로 맞지 않더라도, 내치 전권을 준다고 했어야 했다. 대통령 운신의 폭이 더욱 축소될 것을 우려한 일부 논리 때문에 김 총리 내정자에게 과감한 지원사격을 하지 못한 게 못내 아쉽다. 나는 개인적으로 기자들에게 김 총리 내정자를 ‘내치 대통령’이라고 표현해도 된다고 말했으나, 당시 청와대 전체 논리와 지형을 바꾸지는 못했다.
물론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김병준 카드가 살아났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본질적으로 김병준 카드는 야당과의 기 싸움에서 살아남지 못했다. 청와대는 김병준을 지켜낼 힘이 없었다.
대통령은 11월 7일 오후 늦게 김병준 카드를 포기하기로 하고 국회에 통보했다. 그리고 8일 정세균 국회의장을 찾아가 새로운 총리의 국회 추천을 요청했다.
“국회에서 여야 합의로 좋은 분을 추천해주신다면 그분을 임명해서 내각을 실질적으로 총괄하도록 하겠습니다.”
대통령은 국회의장에게 이렇게 제안했다. 김병준 카드는 제대로 기능도 해보지 못하고 일주일 만에 사라지게 됐다. 김병준 카드가 살아나지 못하면서 박근혜 정부의 마지막 구명 동력도 사라지게 됐다.
대통령이 그해 11월 1일 내게 한 말
박근혜 대통령이 2016년 11월 8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정세균 국회의장과 면담하기 위해 자리로 향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대통령은 그 어려운 시기에도 박근혜 정부 정책 홍보를 걱정했다. “박근혜 정부가 밤낮없이 노력해 정책을 만들어냈는데 홍보가 너무 되지 않고 있다”는 한탄이었다. 대통령은 11월 1일 나를 만났을 때 말씀의 상당 부분을 정책 홍보의 필요성에 대해 할애했다. 그 어려운 시절을 지탱해주는 마지막 한 가닥 희망을 정책에 둔 것 같았다. 밤낮없이 일했으니 박근혜 정부 정책을 통해 국민이 진정성을 이해해줄 것이라는 한줄기 기대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였다.
“나는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지만, 사실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미 최순실 사건으로 국민은 박근혜 정부 정책에 대해 아무 관심을 갖지 않고 있었다. 순수하면 국민이 언젠가 이해해줄 것이라는 비현실적 믿음에 근거한 것이다.
그 당시 청와대는 어느 정부에서도 하지 못한 장기 미해결 과제를 박근혜 정부가 이뤄내고 있다는 점을 홍보하려 했다. 물론 하지 못했다. 지금 보면 상당히 의미 있는 내용이다. 특히 공무원연금개혁과 기초연금, 노동개혁 등은 대통령이 애착을 가진 개혁이었다. 공무원연금개혁은 향후 70년간 매일 194억 원, 총 487조 원의 국민 부담을 경감시키는 개혁 조치였다. 물론 이 조치를 공무원들은 싫어했다. 기초연금은 기존 계획을 14년 앞당겨 448만 명에게 종전보다 2배의 지원을 하는 고령화 시대 복지개혁이다. 노동시장 이중구조 개선 등을 위한 노동개혁은 향후 5년간 37만 개의 일자리 창출을 위한 시작이었다.
대통령은 정부 말기에 반대 세력이 기승을 부리는데도 불구하고 공공, 노동, 금융, 교육 등 4대 개혁과제를 도출해 추진해온 데 대해 자긍심을 갖고 있었다. 대통령은 그 험난한 11월에도 정책에 대한 이 같은 집착을 포기하지 않았다
몸 둘 바 모른 의무실장, 허탈해한 대통령
2016년 가을은 정부 정책이 아니라 최순실 사건만이 언론 관심의 대상이었다. 언론이 대통령을 끌어내렸다고 좋아하는 기자들도 있지만, 검증되지 않은 뉴스의 과다 생산이라는 오명 자체를 부인하기 어렵다.
물론 오보가 아닌 기사도 많다. 하지만 언론은 100개의 보도를 자랑하기 이전에, 한 개라도 오보가 발생한 것에 더욱 무거운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언론이 마녀사냥의 도구로 활용되면, 우리나라의 지성적 풍토는 파괴될 것이다. 그래서 언론은 민주주의와 인권의 마지막 보루인 것이다. 기사 하나가 사람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다는 점에서 ‘언론 윤리’의 중요성은 수습기자 때부터 수도 없이 가르친다. 그것이 언론의 공정성이고 책임의식이다. 특히 개인의 사생활을 보도하는 행위는 신중해야 한다. 대상자가 아무리 공인이라도 사생활 보도를 근거 없이 제기할 권한을 언론에 준 건 아니다.
10월 24일 JTBC 태블릿PC 보도 이후 대한민국 언론은 ‘오보 특권’을 가진 것처럼 비쳤다. 그전까지는 조금씩 조심했으나 정부가 오보를 통제할 힘과 권위를 상실하면서 봇물 터지듯 나왔다. 검경이 오보를 통제하는 게 아니라 불분명한 사실을 흘려 오보를 조장하는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언론의 자정 기능이라는 것도 의미 없었다. ‘특종 경쟁’이라는 명분으로 오보는 무한 재생산되고 있었다. 착한 기자들이 손해 보는 세상이었다. 많은 기자가 오보를 냈지만, 그 이상으로 많은 기자는 오보를 낸 동료 기자들을 비난했다. 그래도 오보의 승리였다. 지금도 그 기자들과 만나 그 시기를 떠올리며 씁쓸한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다.
종합편성채널의 경우 최순실 관련, 하루에 20개 안팎의 기사를 생산했다. 깊이 있게 취재하는 것은 애당초 무리였다. 취재원에 상관없이 ‘카더라’ 보도가 줄을 이었다. 종편이 선도했지만, 신문이라고 크게 다를 게 없었다.
11월 말 청와대 의무실에서 경호실 용도(고산병 치료)로 구입한 ‘비아그라’(성 기능 장애 치료제)를 보도하고, 기도폐색 등 응급 상황 발생 시 사용하는 ‘에토미데이트’(수면마취제)를 ‘제2의 프로포폴’이라고 보도하면서 마치 대통령의 마약 복용과 성적(性的) 연관성이 있는 것처럼 꾸며져 보도될 때는 아연실색했다. 비아그라 보도가 나왔을 때, 대통령은 의무실장에게 전화해 한숨을 내쉬었다.
“비아그라는 왜 샀나요?”
육군 출신의 의무실장은 몸 둘 바를 몰랐다. 고산병 치료제로 경호실에서 과거 정부부터 구입하던 일이라고 말하자, 대통령은 너무나 허탈해했다. 이런 일이 비일비재했다. 주사 및 미용시술 의혹 등이 쏟아질 때도 의무실장은 식은땀을 흘렸다. 의무실장에 따르면 대통령은 건강상의 이유 때문에 간호장교를 통해 비타민 주사와 영양 주사 등을 자주 맞는 편이며, 주사를 맞을 때도 1시간 이내로 줄이라고 하고, 주사를 맞으면서도 업무 자료를 본다는 것이다. 이것도 이미 언론에 기사가 도배되고 난 한참 뒤의 설명이다. 의무실장은 대통령이 마치 무슨 ‘이상한 주사’라도 맞은 듯이 일방적으로 당하는 데 대해 안타까워하며 어쩔 줄 몰라 했지만, 군 출신이라 대통령의 지시 없이는 어떠한 말도 하지 못하는 스타일이었다.
우주, 혼, 현몽…주술적 분위기 극대화
11월 중순 언론이 “통일 대박은 최순실 씨 아이디어”라는 미확인 보도를 하자, 현경대 전 의원이 나에게 전화해 “오보”라고 알려줬다. 그것은 현 전 의원과 서울대 법대 동기인 신모 중앙대 교수의 2012년 책에서 처음 사용된 것으로, 자신이 확산시켰다고 전했다. 청와대는 실제 확인 후 ‘통일 대박’이 신 교수의 책 내용에서 나온 것이라고 해명했다.
우주와 혼에 대한 주술적 보도 역시 황당했다. 파견된 공무원 출신 청와대 행정관이 파울로 코엘료의 책 ‘연금술사’에서 ‘간절히 원하면 온 우주가 도와준다’는 대목을 인용해 연설문 초안을 작성한 것인데, 최순실이 대통령에게 입력시킨 주술적 메시지로 둔갑됐다.
이처럼 11월은 ‘오보의 홍수’였다. 최순실과 무기중개상 린다 김 사이 친분이 있고, 무기 거래에도 손댄 의혹이 있다는 보도에 대해 록히드마틴사가 나서서 부인했다.
‘청와대 들어간 침대 3개, 2개는 누가 썼나’라는 제목의 선정적 보도도 있었지만, 사실과 달랐다. 청와대는 “2개의 침대가 각각 관저와 저도에 비치돼 있고, 나머지 1개는 사용되지 않고 있다”고 해명했다.
‘최순실이 관저에서 잠도 자고 갔다’는 근거 없는 보도도 11월 2일 있었다. 최순실은 관저에서 잠을 잔 적이 없다. ‘최순실이 해외순방에 동행했다’는 오보에 대해 사실이 아니라고 밝혔는데도 몇몇 언론사가 계속 기사화했다. 이런 기사는 거의 매일 쏟아져 나왔다.
최태민의 ‘현몽’ 관련 기사도 단골 메뉴였다. 11월 9일 최태민이 영애 시절부터 ‘국모(國母)’를 주입했다는 기사를 비롯해, 최태민 일가를 활용해 주술적 분위기를 극대화하는 내용이 유독 많았다. 이는 대통령을 바보로 만들었다.
지금 보면, 언론 보도는 약간의 패턴을 갖고 있었다. 미르나 K스포츠재단 관련 비리는 11월 초에 사실상 높은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최태민, 최순실 일가와의 관계를 강조하는 기사 △세월호 당일 행적에 의혹을 제기하는 기사 △미용이나 성형 의혹, 여성 비하 기사 등이 11월 말과 12월에 주류를 이뤘다. 심지어 세월호 사고 당일 성형 의혹 기사도 많았다. 이런 보도들은 최순실 비리나 국정농단 사태의 본질과도 상관없는 일이다. 국민감정을 악화시켜 통치 능력이나 자격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대통령의 얼굴이 ‘프티 성형 백화점’이라는 기사는 지금 봐도 어의가 없다.
문재인 정부의 가짜뉴스 논쟁
문재인 정부는 집권 2년차로 들어서면서 가짜뉴스 논쟁에 뛰어들었다. 어느 정권이든 겪는 늪에 빠져든 것이다. 그중 한 가지만 지적하고자 한다. 김의겸 전 청와대 대변인이 언론의 보도 문제점을 지적하다가 “더욱 씁쓸한 것은 과거의 보도 태도와 너무나 다르기 때문”이라고 언론을 비판한 대목이 목에 걸렸다. 탄핵 정국 때는 수많은 오보를 즐겼으면서도 과거의 보도 태도를 거론하는 것은 정당성을 얻기 어렵다.
탄핵 정국 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여성 대통령의 끝을 보려면 한국의 여성 대통령을 보라”고 말했다는 뉴스가 TV를 통해 방송됐다. 한 네티즌이 장난으로 올린 글이 퍼진 것이다. 당연히 가짜뉴스다. 대한민국 대통령의 품격을 떨어뜨리는 뉴스이지만, 어느 정치 세력도 문제를 제기한 적이 없다.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이 출마를 앞두고 있으니까, 안토니오 구테헤스 신임 유엔 사무총장이 “반 총장의 대선 출마가 유엔 결의 위반이라고 지적했다”는 기사가 지상파 라디오를 통해 전파를 탔다. 역시 가짜뉴스다. 대선을 앞둔 민감한 시기의 범죄다. ‘드루킹 사건’이 무서운 것도 ‘드루킹’이 대선 등 선거에서 활동했기 때문이다(드루킹 사건은 경제적공진화모임(경공모) 대표 김동원(필명 드루킹)을 비롯한 경공모 회원이자 더불어민주당 권리당원들이 김경수 경남지사와 공모해 인터넷에서 각종 여론조작을 했다는 혐의로 기소돼 재판을 받고 있는 사건. 김 지사는 1심에서 댓글조작 혐의에 대해 징역 2년 실형을,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에 대해선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항소했다).
대한민국 과거의 보도 태도를 따지자면, 어느 언론이나 어느 정치인도 자유롭지 못하다. 정치인들은 때로 오보를 즐기고, 때로는 오보의 피해자가 되기 때문이다. 유리한 과거와 불리한 과거를 나누고, 그를 통해 논리를 전개한다면 언론이 수긍하지 않을 것이다.
적대주의가 만든 정치 도구
중요한 사실은 우리나라 가짜뉴스의 경우 대부분이 정치적 목적으로 유통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미국의 가짜뉴스가 돈벌이 목적에서 출발한 것과 차이가 있다. 서방의 가짜뉴스가 마케도니아의 17세 소년이 트럼프 지지자를 대상으로 가짜뉴스를 생산해 약 6만 달러의 광고 수익을 냄으로써 형성된 ‘디지털 골드러시’의 일환이었다면, 우리는 오로지 정치적 목적이다. 가짜뉴스가 정치 도구로 활용되고 있다. 이 차이를 인정해야 해법이 나온다. 그것이 본질이다. 그런데 문재인 청와대의 각종 어법은 가짜뉴스의 정치적 성격을 더욱 강화하고 있는 것이다.
반대편에 대한 극단적 적대주의를 통해 가짜뉴스는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기승을 부릴 것이다. 가짜뉴스를 없애려면 정치적 적대 구조를 청산하거나 완화해야 한다. 또 상대방을 배려하는 정치문화가 형성돼야 한다. 단순히 법적 규제를 강화하는 것으로 해결될 수 없다. 문재인 정부는 무수한 오보 터널을 지나온 박근혜 정부를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권력과 언론의 싸움에서 결국 권력이 진다.
영국 BBC의 토니 홀 사장은 2018년 세계공영방송 총회 참석차 서울을 방문했을 때 가짜뉴스에 대한 권력적 특성을 강조했다. 카메룬 군대가 두 명의 여성과 두 명의 어린이를 총으로 협박해 끌고 가 총살시킨 영상이 인터넷에 유포되자 카메룬 정부는 “가짜뉴스”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BBC가 탐사보도를 통해 사실임을 확인하는 보도를 했다는 것이다. 정치적 목적으로 거론되는 가짜뉴스의 경우 정치 행위자의 주장을 믿을 수 없으며 끝까지 진실을 탐구함으로써 해결된다는 암시였다.
특히 가짜뉴스는 권위적 방식, 다시 말해 ‘꼰대’식으로는 잡을 수 없다. 한겨레신문 성한용 기자는 “가짜뉴스 문제의 출발점은 가짜뉴스라는 용어를 버리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면서 “가짜뉴스 대신 허위정보라는 단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동의한다. 가짜뉴스라는 말 자체가 정치적 목적에서 이뤄지는 상대방 저격용 정치용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다만 허위정보를 가려내는 데 사회와 국민이 건전하게 나서도록 분위기를 형성해주어야 선진국으로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朴 참모들에게 “중심을 잡고 가야 한다”
2016년 12월 26일 서울 남부구치소에서 열린 ‘국회 국정조사특별위원회 현장 청문회’. [뉴스1]
2016년 11월 정국의 또 다른 주인공은 검찰이었다. 검찰은 10월 27일 특별수사본부를 확대 개편한 뒤 11월 20일 중간 수사결과를 발표할 때까지 무서운 기세로 수사를 벌였다. 검찰 입장에서는 명운이 걸린 수사였다. 대통령의 명운도 검찰 손으로 상당 부분 넘어가고 있었다. 11월 4일의 제2차 대국민담화가 성공하지 못한 가장 큰 외부 변수를 꼽으라면 단연 검찰수사라고 할 수 있다. 형사불소추 특권을 가진 현직 대통령이라도 빠져나갈 수 없는 국면이 검찰수사에 의해 상당 부분 조성되고 있었다.
검찰 수사에서 최대 악재는 검찰 손에 쥐어진 ‘안종범 다이어리’와 ‘정호성 녹음 파일’이었다. 검찰로서는 예상 밖의 전리품이었고, 대통령으로서는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정호성 녹음 파일은 국민감정을 악화시키는 소재였고, 안종범 다이어리는 대통령의 범죄혐의를 옭아매는 데 결정적 증거로 사용됐다. 위기 상황을 극복해보려던 많은 사람의 노력은 ‘찻잔 속의 태풍’처럼 무력해졌다. 법률가들 중에서 ‘대통령에게 불리하게 돌아갈 것’이라고 점치는 사람이 늘어났다.
대통령은 사실 ‘최순실이 귀국해 검찰 수사에 협조하고, 청와대 수석과 3인방이 퇴진하면 수습 국면으로 접어들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 기대를 안고 2차 담화를 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검찰 수사를 통해 연일 최순실 비리혐의가 공개되자 일체의 수습 노력은 국민에게 전혀 공감을 주지 못했다. 수습 대책 중 대표적으로 먹혀들지 않았던 것은 임종룡 경제부총리 임명 건이었다. 금융위원장이었던 임 부총리 내정자는 전북 출신에 관료 사회뿐 아니라 정치권에서도 능력을 인정받고 있었으나, 당시 분위기에서 인사청문회를 통과할 수 없었다.
당당한 이미지 무너진 첫 사례
11월 중순으로 접어들면서 대통령은 말수가 줄어들었다. 대통령은 며칠간 침묵으로 대응했다. 참모들에게도 불필요한 발언을 자제하도록 당부했다. 대통령은 참모들에게 “팔랑팔랑대지 말고 중심을 잡고 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만큼 살얼음판 같은 상황의 연속이었다. 말 한마디가 살얼음판을 깰 수도 있었다. 참모들도 극도로 말조심을 했다. 실제 할 수 있는 말도 없었다. 검찰수사망은 조여오고, 여론의 반전은 없는 상태에서 청와대는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더구나 검찰의 대통령 조사 여부 때문에 다른 사안을 신경 쓰기도 어려웠다. 대통령은 조용히 검찰 조사에 대비했다. 최대 고민은 대통령이 직접 검찰조사를 받느냐 여부였다. 당초 청와대에서는 대통령의 검찰 조사를 수용해야 한다는 논리가 우세했다. 무엇보다 여론의 압박이 가장 컸다. 여론은 대통령이 조사받기를 요구했다. 또 2차 담화에서 검찰 수사에 협조하겠다고 약속해놓고 조사를 거부하기도 힘들었다. 검찰 조사는 무언의 당위론으로 받아들여졌다. 참모들도 대통령이 검찰 조사를 통해 의혹 내용을 제대로 반박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이 같은 당위론은 검찰 수사망이 구체적으로 조여들어오면서 달라지기 시작했다. 검찰 조사를 받는다고 해서 상황이 변하지 않으며 오히려 여론에 악재로 작용할 수 있다는 ‘불가론’으로 대체됐다. 또 이미 검찰이 각본을 세우고 수사하고 있는데, 대통령 조사가 무의미하다는 논리가 대두됐다. 이 때문에 검찰과 대통령 조사 시기와 방법을 두고 물밑 협상이 진행되다가 마지막에 결렬됐다. 검찰 조사를 받지 않게 된 것이다.
또 11월 17일 국회에서 ‘특검법’이 통과되면서 검찰 조사를 받기 어렵게 만든 측면도 있다. 검찰 조사만 받고 특검 조사를 거부하면 야당의 공세를 받게 될 텐데, 대통령이 연거푸 조사를 받아야 하는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검찰과 특검 모두 권력을 잃어가는 대통령을 대상으로 망신주기와 밀어붙이기용 수사를 벌일 수 있었다. 이 같은 대응 논의는 주로 법률가들을 통해 이뤄졌다. 법률적 대응에 정무적 참모들이 끼어들 여지가 많지 않았다. 대응의 주도권이 법률가들에게로 넘어가는 첫 번째 고비였다. 그리고 정무적 대응은 더더욱 꼬여갔다.
당시 대통령의 검찰 조사 논란은 3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대통령이 조사를 받지 않음으로써 대통령의 당당한 이미지가 무너진 첫 사례로 평가됐다. ‘약속의 정치인’ 이미지도 사라졌다. 대통령이 평생 축적해온 신뢰의 자산이 무너진 것이다. 국민에게 약속한 일이기도 했지만 실제 ‘대통령 신분인 상태에서 조사를 받는 게 그나마 낫지 않았느냐’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당시만 해도 최순실 사건이 완벽한 실체를 드러내기 전이었기 때문에 조사를 통해 사건의 실체를 어느 정도 바꾸어 갈 수도 있었다고 본다. 한마디로 대통령 발언의 무게감이 그나마 살아 있을 때인 만큼, 조사를 통한 적극적 항변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면 검찰도 일방적으로 몰아가는 데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검찰 수사는 특검수사에 그대로 연결되기 때문에 검찰이 전체 수사 방향과 내용을 어떻게 설정하느냐는 아주 중요하다. 싸워볼 만한 여지가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지나놓고 보면, 조사를 받든 안 받든 달라지는 것은 없었겠다 싶다. 전체 흐름을 뒤바꾸는 데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대통령의 이미지를 생각한다면 조사를 받고 끝까지 당당하게 대응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크다.
유영하 변호사가 전면에 등장한 것도 이즈음이다. 대통령이 유영하를 개인 변호사로 선임한 것이 2016년 11월 15일경이다. 검찰은 11월 20일 중간수사결과를 발표했다. 검찰은 대통령을 최순실과 공모관계가 있다고 적시하고 피의자로 입건해 수사할 것이라고 밝혔다. 예상은 했지만 파장은 컸다. 대통령이 이제 범죄자 취급을 받게 된 것이다. 당시만 해도 삼성과의 뇌물죄는 인정되지 않았다. 주로 미르와 K스포츠재단과 관련된 혐의였다. 그럼에도 검찰 수사 결과 발표는 대통령 ‘탄핵 열차’가 9부 능선을 넘어가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본다.
유영하 변호사는 곧바로 반박 성명을 발표했다. ‘최순실이 유죄인 것이지, 대통령이 유죄라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는 논리였다. 검찰수사를 ‘환상의 집’ ‘사상누각’ 같은 표현으로 강하게 공격했다. 대통령과 검찰의 강한 대립은 많은 사람을 긴장시켰다. 둘 중에 하나가 패자가 돼야 하는 게임 같았다.
최재경 사퇴 발표 만류한 진짜 이유
2016년 11월 18일 청와대에서 열린 신임 정무직 임명장 수여식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최재경 민정수석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검찰 수사 결과 발표 다음 날인 11월 21일 김현웅 법무부 장관이 사의를 표명했다. 검찰이 현직 대통령을 피의자로 규정한 마당이니 법무부 장관의 설 땅이 없어진 셈이다. ‘검찰 수사에 책임을 지는 마음’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또 법무부 장관이 대통령을 위해 대놓고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기도 어려운 상황이어서 장관직을 계속 맡기 힘들었을 것으로 이해됐다. 그런데 다음 날 최재경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도 함께 사의를 표명한 것으로 확인됐다. 최재경 민정수석은 당시 대통령이 가장 신뢰하고 의지하던 최고의 참모였다. 원만한 성격과 합리적 사고, 신중한 일처리가 돋보였다. 검찰에서도 후배들의 신망이 높았다. 우병우 전 수석의 후임으로 임명될 때 많은 사람의 기대를 모았다. 불행히 최재경의 청와대 재임기간은 너무나 짧았다. 10월 30일 수석에 임명됐는데, 한 달도 안 돼 사표를 제출한 것이다.
대통령은 11월 24일 오후 배성례 홍보수석에게 김현웅 법무부 장관과 함께 최재경의 사표 수리를 발표하라고 지시했다. 홍보수석이 발표를 하려는 순간, 나를 비롯한 홍보수석실 관계자들이 모두 막아섰다. ‘법무부 장관이라면 몰라도 민정수석의 사표 수리를 발표할 타이밍은 아니다’라고 반대논리를 폈다. 지금 최재경의 사표 수리를 발표하면, 적어도 언론에는 정부의 붕괴를 공식화하는 의미로 비칠 공산이 컸다. 최재경은 그만한 상징성을 갖고 있던 인물이다.
안 그래도 정부 부처들은 저마다 청와대와 관계를 끊고 독립적으로 움직이려고 하던 시점이었다. 이미 교육부가 청와대와 상의 없이 국정교과서 추진을 사실상 포기하는 언론플레이를 하고 있었다. 다른 부처들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속출하고 있다고 들었다.
언론에서도 청와대의 영(令)이 서지 않는다는 기사를 쏟아내고 있던 시점이다. 이런 기사들은 그래서 대통령 탄핵을 빨리 해야 한다는 논리로 이어졌다. 대통령에게 재고를 건의했다. 사표 수리의 연고를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지금 민정수석의 사표를 발표할 타이밍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타이밍의 문제였다.
고심 끝에 사표 수리 발표는 보류됐다. 나는 최재경 수석의 사표 반려를 주장했으나, 그것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보류로 절충됐다. 평소 말수가 많지 않던 한 수석도 나를 찾아와 “지금 민정수석이 물러나는 것은 절대 안 된다”며 각별히 걱정했던 기억이 난다.
최재경은 검찰 수사 발표에 대해 심적인 부담이 컸던 것으로 알려졌다. 평상시라면 민정수석을 정말 잘할 수 있는 카리스마와 캐릭터를 지녔지만, 당시 상황에서는 혼자 힘으로 감당하기 버거웠다. 민정수석으로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을 괴로워했고, 대통령에게도 항상 미안한 감정을 지녔던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일에 최선을 다하는 특유의 무한 책임감이 본인을 더욱 힘들게 했다. 또 대통령이 피의자로 규정된 상황에서 청와대 민정수석실 차원으로 보좌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점도 그만두려는 결심의 이유였던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향후 계속될 검찰과 특검 수사에 대비해 대통령을 제대로 도우려면 밖에서 도와야 한다는 취지였다. 문재인 대통령이 과거 민정수석을 그만두고 노무현 대통령 탄핵 변호를 진두지휘할 때와 마찬가지로 밖에 있어야 실제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최재경의 사표는 계속 보류되다가 12월 9일 국회 탄핵안이 의결되던 날 수리되고 후임에 조대환 민정수석이 임명됐다. 대통령의 마지막 인사결재였다. 최재경의 사표가 수리된 것은 어떻게 보면 대통령이 최재경을 계속 곁에 두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최재경이 민정수석의 족쇄를 벗고 자유롭게 법률적으로 도와줄 것을 기대했다. 실제 최재경은 수석을 그만두고 헌법재판소에서 탄핵 재판 심리가 이어질 때 물밑에서 대통령 변호를 성심성의껏 도왔다. 그 과정에서 유난히 마음고생이 많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참으로 묵묵히 헌신했던 분으로 기억한다.
트럼프 대통령당선인이 처음 통화한 정상
대통령은 11월 모든 행사를 중단한 상태였다. 이미 JTBC 보도가 난 10월 말부터 대통령의 공식행사는 중단됐다. 국민의 여론이 좋지 않다는 점도 있었지만, 각종 안전사고의 우려도 있었다. 대통령은 11월 동안 카자흐스탄 대통령의 국빈방한 행사만은 예정대로 치렀다. 그게 11월 10일이었다. 이것은 국가 간의 약속인 만큼 지키지 않을 방법이 없었다. 또 신임 주한대사 신임장 제정식도 예정대로 치렀다. 이 두 가지 외교 행사 외에는 모든 공식 일정이 취소됐다.
그렇지만 11월에 가장 중요한 대외변수는 미국 대선이었다. 대통령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당선이 한반도 정세에 미칠 영향 등에 대해 철저하게 대비하기를 바랐다. ‘아메리칸 퍼스트’를 외치는 트럼프가 당선되면 한국에 대해서도 ‘압박’을 가할 것이라는 예상이 많았다. 트럼프의 당선은 우리 시각으로 11월 9일 오후에 결정됐다. 대통령은 관련 뉴스와 보고를 받으면서 한국이 주도적으로 미국의 새 대통령과 협력해야 한다는 점을 무겁게 생각했다. 청와대는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회 회의를 열어 미국의 대선 결과 이후의 상황을 점검했다.
박 대통령과 트럼프 당선자의 통화도 곧바로 연결됐다. 당선 발표 다음 날인 10일 오전 대통령은 트럼트 당선자와 전화 통화를 하고 한미동맹과 방위공약을 재확인했다. 미 대통령 당선자 트럼프가 한 정상 간 통화로는 가장 빠른 통화였다. 대통령 처지에서도 모처럼 대통령으로서의 정상적인 업무를 한 것이었다. 트럼프는 “한국을 방어하기 위해 굳건하고 강력한 방위 태세를 유지할 것”이라며 “흔들리지 않고 한국과 미국의 안전을 위해 끝까지 함께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대통령은 11월 비공식 일정으로 트럼프 대통령의 측근으로 알려진 에드윈 퓰너 전 헤리티지재단 이사장과 면담하면서 트럼프 당선 이후 한미 관계의 지속성과 한미동맹의 중요성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그만큼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조태용 청와대 안보실 차장은 15일 트럼프 대통령 당선자 측과 협력을 위해 지체 없이 미국을 방문했다. 외교 안보 분야만큼은 청와대에서 공백이 없어야 한다는 강력한 메시지였다. 시간이 허락돼 대통령이 트럼프와 협력할 수 있었다면, 한반도의 흐름도 아주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김정은이 훨씬 저자세로 미국과 한국에 협력하면서 ‘힘을 통한 평화 모드’가 한반도에 나타났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북한 문제 해결에 공들였던 대통령의 수많은 시간을 기억하기에 임기 단축은 더욱 더 안타까운 일로 느껴진다.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이 체결된 것도 11월이었다. 당시 민주당은 강력 반대했지만, 그 때 체결된 협정은 문재인 정부 들어서도 폐기되지 않은 채 계속 이어지고 있다.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은 한국에 유리한 협정이다. 대북 군사정보와 관련해서 위성을 이용한 일본 측 정보가 많고, 우리는 이를 공유할 수 있다. 미국이 권유하고 있고, 공유하는 정보도 많은 만큼 당연히 한일간에 협정을 통해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
이 협정은 어디까지나 핵과 미사일 관련 정보를 절차에 따라 주고받기 위한 보호협정이다. 정보를 공유하기 위한 기본 절차 협정이다. 정보 공유가 목적인 게 아니라 정보공유 프로토콜이 협정의 핵심이다. 이 협정은 국무회의를 거치도록 돼 있으며, 대통령의 관심이 증폭돼 있다는 점을 감안해 최대한 ‘로 키(low key·이목을 끌지 않고 조용히)’로 추진되었다, 대통령은 정치적 연관이 없다면 효율적으로 진행되기를 원했다.
“국정 공백이 없도록 해달라”는 당부
대통령은 검찰수사 결과 발표를 며칠 앞둔 험악한 상황에서도 수석들에게 “국정 공백이 없도록 해달라”는 말을 몇 번이나 당부했다. 국회에서 탄핵소추 의결이 있기 직전까지도 그랬다.
물론 그 시절에 그런 게 무슨 소용이 있었느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탄핵을 당하지 않도록 하는 데 주력해야지 국정 운영에 미련을 갖는 게 무슨 의미냐는 회한이다. 앞서 설명한 대로 각 부처는 이미 청와대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있었고, 독자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미 박근혜 정부를 떠받들고 있던 벽돌들은 하나둘 떨어져 가고 있었다. 이와 함께 탄핵 시계는 째깍째깍 대통령을 압박하고 있었다. 그렇게 11월 말이 다가오고 있었다. 11월 말과 12월 초는 국회 탄핵표결을 앞둔 마지막 운명의 시간이었다.
제1부 ‘폭풍의 서막’ 독자 반응을 보면서…
“역사는 용기 있을 때 기록될 뿐”
박근혜 정부의 마지막 140일에 대한 기록이 ‘신동아’ 6월호를 통해 게재되면서 다양한 반응이 쏟아졌다. 의외로 많은 분이 읽어주셨고 격려해주셔서 감사드린다. 특히 30, 40대 독자가 많았던 점은 신기했고 놀라운 경험이었다. 박근혜 정부를 소재로 한 글도 ‘욕’을 먹지 않고 대중에게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일종의 금서(禁書)가 풀린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민감한 내용들이 포함돼 있어 필자로서는 여전히 조심스럽고 걱정스럽다. 혹시 내 글로 불편한 분들이 생기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으나, 일부 불편함을 제기한 분들도 있었다.
이들은 대통령과 관련된 너무 디테일한 내용에 일단 본능적인 불편함을 호소했다. 특히 박 대통령이 윤전추 대통령비서실 제2부속실 행정관 앞에서 눈물을 보인 대목에 대해 마음이 편치 않았다고 했다. 대통령을 너무 ’울보 대통령‘으로 만들었다고 했다. 박 대통령의 단호하고 강인한 본래의 이미지와도 맞지 않다는 것이다. 맞는 반론이다.
다만 지난 첫 회의 글은 기나긴 연재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최순실 사태에 따른 언론 보도가 집중된 2016년 10월 말과 11월 초의 이야기다. 약 열흘간의 미세한 기록이다.
대통령은 그 이후로 눈물을 보인 적이 거의 없다. 초창기 당혹스러웠고 비참했던 심경을 눈물로 표출했고, 그 시기도 열흘 정도에 불과했다. 1부 연재가 그 시기에 집중되다 보니 나타난 착시현상이라고 본다. 코끼리 다리 만지듯 대통령의 순간 이미지를 곡해해서 받아들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울보 대통령’ 만들었다는 비판
그러나 눈물은 약함의 표시이기도 하지만, 마음을 다잡는 결의의 심경을 나타내기도 한다고 본다. 대통령은 눈물 때문에 판단을 유보하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그건 대통령 심경의 일단일 뿐이고, 오히려 이를 악물고 당시 상황을 바로잡아보고자 노력했다고 기억한다.
물론 독자 대부분은 균형감 있게 당시 상황을 이해했으며, 도움이 됐다는 반응을 주었다. 이 연재를 부분으로서가 아니라 전체로서 보게 된다면, 연재가 특별히 일부를 곡해하거나 무리하게 부각하는 등의 불편부당한 개인적, 정치적 의도를 갖고 쓰지 않았음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일부 사적인 에피소드를 소개할 수 있었던 것도 대통령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비서에게 평등하고 인간적으로 대했기 때문이다. 각자가 선호하는 이미지만으로 박 대통령에 대한 기억을 유지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런 확증편향이 올바른 것은 아니다. 이 글은 가능한 한 박 대통령의 전체 모습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고자 했으며, 그래야 역사 속에서 대통령을 올바로 자리매김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나는 과거 대통령 관련 책을 저술하면서 2006년 커터 칼 사건(2006년 5월 20일 오후 7시 15분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서울 신촌 현대백화점 앞에서 오세훈 서울시장 후보 지원유세에 참가하던 도중 괴한에게 커터 칼로 얼굴을 피습당한 사건) 당시 수술을 받으면서 박 대통령이 의사에게 “내 속살을 본 첫 남자예요”라고 말했다는 에피소드를 서술했다. 박 대통령과 관련한 글을 너무 옐로페이퍼처럼 기술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대통령의 모습을 가감 없이 표현하려 했을 뿐이다.
필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글이 반대 세력이나 특정 정치꾼들에 의해 악용될 우려는 상존한다. 그런 염려가 많이 전달돼왔다. 여전히 많은 사람이 재판이나 수사를 받고 있는 상황이어서 신경이 쓰인다. 반대파에게 공격의 빌미를 주는 것도 문제이지만, 우군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파벌로 쪼개져 ‘총싸움’을 벌이는데 활용되는 최악의 상황도 염려스럽다. 최대한 불편한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는 말씀 외에 더 드릴 말이 없다.
또 하나. 당시 상황을 전달하다 보니 불가피하게 이름을 쓰게 된 윤전추 행정관 등 몇몇 분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 모든 사람의 기억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가물가물해지기 때문에 일부는 헷갈리거나 달라질 수 있다고 본다. 그래서 기억에 의존하는 글은 항상 조심스럽다. 독자들이 감안해서 해석하리라 생각한다.
떠올리기 싫은 고통의 작업
글을 쓰면서 불필요한 호칭을 생략하는 경우가 많다. 가령 정호성 전 대통령비서실 제1부속비서관의 경우에도 직책을 생략한 채 ‘정호성’이라고 적었다. 모든 등장인물에 이 같은 원칙을 적용하다 보니 일부 불쾌하게 생각하는 분도 있었다. 독자의 편안한 읽기를 배려한 나의 글쓰기 습관에서 비롯된 일로 이해해주길 바란다.
연재가 시작되자 마자 한 시사주간지는 박 전 대통령과 최순실, 정호성의 대화 녹취록을 공개했다. 연재 다음 날 공개돼 다양한 억측이 제기됐다. 그 녹음은 이미 검찰에 압수될 당시부터 논란이 됐던 것이고 내용도 어느 정도 공개됐던 것이어서 새로운 것은 없다. 녹음 내용에 대해 책임 있게 해명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지만, 지난번과 이번 연재에 녹취록을 있는 그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내 나름의 분석을 했음을 밝힌다.
이 모든 게 결국 떠올리기 싫은 기억을 다시 하게 되는 고통의 작업이라는 점이 가장 큰 문제다. 일부는 필자가 이 고통의 기억을 끄집어냈다고 원망하는 사람도 있다.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는 것이다. 그것만은 교정하고 싶다.
역사는 싫든 좋든 승자의 기록이다. 박근혜 정부의 기록은 먼 훗날 다시 발굴되지 않는다. 좌파는 짓밟을 것이고 우파는 외면할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역사는 승자들에 의해 편집돼, 박근혜 정부는 역사 서술에서 아예 삭제될지 모른다. 모든 국민이 떠올리기 싫어하는 역사가 될 수도 있다. 더구나 항변의 기록은 하나도 없다. 아무도 쓰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 세월호가 그렇고 탄핵이 그렇다. 정무적이고 법률적인 투쟁뿐 아니라 역사전쟁에서도 이미 지고 있고, 격랑에 휩쓸려갈 뿐이다. 2년 전에도 기다리라는 말만 반복했듯이, 지금도 무엇을 기다릴 것인지, 기다린 후에는 무엇이 올 것인지 알지 못한다. 기대와 달리 박 전 대통령에게 내년은 올해보다 더 좋지 않을 수 있고, 내후년은 더 최악일 수 있다. 가만히 있어 좋아질 수는 없다. 향후에는 재판 기록이 공개되면서 지금보다도 훨씬 심한 역사 지우기가 있을 것이다.
그럼 역사는 언제 기록되는가. 타이밍이 따로 없다. 용기가 있을 때 기록될 뿐이다. 또 기록할 사람이 있으면 하는 것이다. 때가 지나면 ‘흑역사’만 남는다. 역사는 ‘전두환 정권에서 연 10%씩의 경제성장을 기록했다’는 성공은 기억해주지 않는다. 역사전쟁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은 잊히거나 버림받거나 둘 중 하나일 뿐이다. 로마 역사에서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이후 서로마제국 멸망까지 약 300년간 측근인 근위대에 의해 퇴출되거나 목숨을 잃은 수많은 황제가 있었다. 그들 중 선정을 베푼 군주가 있었지만, 누구도 나중에 유능한 황제로 다시 기록된 역사는 없다. 역사의 우회로는 없다. 역사의 공간에 숨 쉴 수 있는 조그만 생태 공간이라도 만들고 싶어 하는 노력의 일환이란 점을 이해해주길 바란다.
전 대통령비서실 홍보기획비서관·계명대 초빙교수 youngsikchun@gmail.com
[이 기사는 신동아 7월호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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