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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사람들

'현대건축의 잔다르크' <필리스 램버트 86세 女>한국의 고인돌 앞에 서다

by 달빛아래서 2013. 4. 14.

[주간조선] '현대건축의 잔다르크' 한국의 고인돌 앞에 서다

  • 황은순 차장
  •  

    입력 : 2013.04.13 19:13 | 수정 : 2013.04.14 08:33

    그는 고인돌을 찾아 떠난다고 했다. 서울 지하철 2호선을 타고 신촌역 2번 출구로 나가면 강화도 고인돌 유적지로 가는 버스가 있다고 했다. 수천 년 전 인류의 무덤 앞에서 그는 무엇을 보고 싶었던 것일까? 4월 9일 보름간의 한국 일정을 끝내고 인천공항으로 가기 전에 고인돌을 꼭 보고 가야겠다는 그의 짐은 가방 하나가 전부였다.

    그 전날 서울 종로구 안국동의 한 한옥 골목에 있는 작은 레스토랑. 백발에 쇼트커트를 하고 검은색 캐시미어스웨터를 걸친 그는 소탈해 보였다. 목소리는 80대 같은데 잡티 하나 없는 피부는 60~70대로 보여 나이를 가늠하기 힘들다. 몸에 걸친 액세서리라고는 플라스틱 재질로 보이는 빨간 반지가 전부이다.

    그가 테이블에 놓여 있는 나무로 만든 냄비 받침을 들더니 “소나무 냄새가 난다”면서 좋아한다.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주위를 살피더니 “가져가야겠다”고 말하면서 나무 받침을 자신의 가방에 쏙 집어넣고는 시치미를 뚝 떼고 앉아 있다. 그저 평범한 외국인 할머니 같아 보이는 그가 사실은 엄청난 부자이고 ‘현대건축의 잔다르크’로 불릴 만큼 세계 건축계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국내엔 거의 없다.

    photo 염동우 영상미디어 기자

    필리스 램버트(86). 그는 시바스 리갈로 유명한 세계적 주류업체 시그램의 오너였던 새뮤얼 브론프만의 딸이다. 에드거 브론프만 세계유대인총회 전 회장이 동생이다. 미국 예일대와 일리노이공대에서 건축을 전공한 건축가이다. 캐나다건축센터(CCA)를 설립하고 현재는 이사장으로 있으며 캐나다 퀘벡주의 몬트리올 도심재생사업을 주도해 오늘의 몬트리올을 만든 인물이기도 하다. 캐나다건축센터는 건축 관련 프로젝트를 가장 활발하게 진행하는 곳으로 MOMA(미국현대미술관)와 함께 세계 건축계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곳 중의 한곳이다.

    그가 한국에 왔다. 한국 건축계도 그의 방문을 알지 못했다. 삼성 리움미술관에서 현재 전시 중인 ‘미장센-연출된 장면들’에 참여한 미디어아티스트 친구인 아다드 하나 가족을 따라 관광차 온 것이다. 우연한 기회에 그의 방문을 알게 된 한양대 건축학부 정진국 교수가 지난 4월 8일 한양대에서 그의 특별 강연을 마련했다. 그는 개인적으로 인연이 있는 정 교수의 부탁을 받고 선뜻 무료로 강연을 수락했다. 강연 후 주간조선이 단독으로 만났다.

    강연 주제는 현대건축의 상징인 ‘시그램빌딩과 캐나다건축센터’. 뉴욕 맨해튼 파크애비뉴 52번가와 53번가 사이, 청동 철재와 전면 유리로 감싸진 38층의 시그램빌딩은 뉴욕타임스의 평론가인 허버트 머스챔프가 ‘지난 천 년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로 꼽았을 만큼 뉴욕 현대건축의 시발점이 됐다. 시그램의 뉴욕 본부인 시그램빌딩은 1958년 완공된 이후 베를린국립미술관 등 전 세계 수많은 건물의 모델이 됐다. 국내 마천루의 시작을 알린 서울 종로구의 삼일빌딩(건축가 김중업, 1969년)도 건립 당시 ‘시그램빌딩’ 모방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시그램빌딩을 설계한 사람은 근대건축의 거장인 ‘미스 반 데 로헤(Mies van der Rohe)’이다. 미스 반 데 로헤를 선택하고 시그램빌딩을 계획단계부터 총감독한 사람이 바로 필리스 램버트이다. 그가 20대 때의 일이다. 그가 없었다면 현재의 시그램빌딩은 없었다.

    한양대 사이버대학 건물에서 오후 4시에 시작한 강연은 약속된 한 시간을 훌쩍 넘겼다. 여든여섯의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열정적인 강연은 강의실 통로까지 채운 건축학도와 교수들의 질문이 이어지면서 2시간 만에 끝났다. 강연 후 바로 진행하기로 했던 인터뷰 일정도 차질이 빚어졌다. 덕분에 안국동에서 밤 10시까지 이어진 저녁식사 자리까지 함께하며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는 나이에 비해 무리한 일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진촬영이며 질문들에 싫은 내색 없이 응했다. 중간중간 힘든지 큰 숨을 들이쉬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건강 비결이 “60살부터 시작한 요가 덕분”이라고 말했다. 요가를 시작하고 두통도 사라졌다고 한다. 커피를 끊었다면서 한국 발음으로 “보리차”를 달라고 했다. 그는 서울에 도착해서부터 북촌의 한옥 게스트하우스에서 묵고 있다고 했다. 온돌방이 불편하지 않느냐고 묻자 “요가를 하면 아무 문제될 게 없다”면서 “온돌마루도 좋고 미닫이문이 흥미로웠다”고 말했다.


    뉴욕 현대건축의 시발점이 된 시그램빌딩의 완공 당시 모습. 이후 주택가가 오피스 거리로 바뀌기 시작했다. photo 캐나다건축센터
    지난 3월 26일 한국에 도착해서 그동안 목포, 여수, 거제, 경주를 거쳐 부산까지 전국을 여행하고 왔다고 했다. 그는 “전남 순천 송광사에서는 템플스테이에 참가했는데 산사의 작은 방에서의 하룻밤이 아주 특별한 경험이었다”고 말했다. 한국을 제대로 느끼고 싶어서 호텔부터 민박까지 두루 묵었다. ‘러브호텔’이 캐나다의 고급 호텔들보다 훨씬 깨끗하고 시설이 좋아서 놀랐다고 했다. 그가 아주 흥미로운 건물을 보았다면서 사진기를 꺼내들더니 둥근 지붕들이 겹쳐진 버섯 모양의 민박집을 보여주었다.

    그는 서울에서 남대문시장도 방문했다면서 “옷을 사면서 깎아달라고 했더니 절대 안 깎아주더라. 재미가 없었다”고 말했다.

    그의 한국 방문은 이번이 두 번째이다. 1993년 서울에서 열린 ‘애니 콘퍼런스(Any Conference·전 세계의 도시를 돌며 건축과 역사를 연구하는 모임)’를 위해 세계 유명 건축가들과 함께 방문했다. 그는 “관광안내 책을 보고 한국을 공부했다”면서 한국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장소를 보고 싶었다고 했다. 그는 “건축은 그곳의 역사와 환경, 그곳에서 살아온 사람들을 고려해야 한다”고 했다. 이런 생각은 그를 ‘건축계의 잔다르크’로 만들었다.


    1971년 시그램 회장이었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그는 몬트리올로 돌아왔다. 당시 몬트리올은 개발업자들을 중심으로 도심 재개발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도시는 온통 옛 건물들을 부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의 눈엔 낡은 건물이 아니라 도시의 역사가 파괴되고 있었다. 그는 ‘헤리티지 몬트리올’ 재단을 설립했다.

    ‘몬트리올을 구하자! 몬트리올을 허무는 것을 멈춰라!’

    기부금을 모으고 시민단체를 규합하고 저소득층을 위한 주거단지 조성을 지휘했다. 결국 정부 보조금까지 끌어내고 몬트리올 구항구 정비를 위한 책임도 맡아 공장지대를 역사지대로 만들었다. 언론은 이때부터 무분별한 개발을 막고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몬트리올의 변화를 이끈 그의 이름 앞에 ‘Joan of Architecture’라는 별칭을 붙였다. 건축계의 잔다르크란 말이었다.

    그가 설립한 캐나다건축센터(1989년 완공)도 의미있는 건축물이다. 캐나다건축센터는 1874년 지어진 건물을 그대로 살리면서 새로운 건물을 이어 붙여 과거와 현대를 결합시킨 건축기법으로 미 건축가협회 건축명예상을 받기도 했다. 캐나다건축센터는 유명 건축가의 모형 작품, 저서 등 건축과 관련한 방대한 자료를 소장하고 있다. 세계의 건축가들을 대상으로 레지던시(입주 지원) 프로그램 등을 운영, 숙식제공 등 연구지원을 해주고 전시회와 학술대회를 여는 등 세계 건축연구를 위한 요람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그에게 서울 도심을 바꾼다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다. 그는 “건축은 건물 하나만 봐서는 안 된다. 도시와 도시에 존재하는 것들을 먼저 존중하고 환경을 고려해야 한다. 그 건물이 주변을 어떻게 발전시킬 수 있나 고민해야 한다. 건축물에 사람이 들어간다는 것을 절대 잊지 마라”고 조언했다. 경복궁을 둘러봤다는 그에게 한국의 전통 건축에 대한 느낌을 묻자 “매우 아름다웠다. 넓은 공간에 여백이 느껴지는 것이 참 좋았다. 건물이 계단 위에 지어진 것도 인상적이었다”고 밝혔다.

    여백을 중시하는 그의 건축관은 시그램빌딩을 봐도 알 수 있다. 법적으로 가능한 범위까지 꽉 채워서 올려진 빌딩들과는 달리 시그램빌딩은 대지의 25%만 건물을 올리고 건물 앞은 시민을 위한 공간으로 만들었다. 그가 시그램빌딩 건축에 뛰어들었을 때 겨우 27살이었다.

    어떻게 그 나이에 엄청난 프로젝트를 맡을 수 있었을까. 그는 “아버지가 맡긴 것이 아니라 내가 그 자리를 꿰찬 것이다. 건축 현장에는 남자밖에 없었다. 사회생활을 해본 경험도 없는 어린 내가 어떻게 그 사람들을 다루고 일할 것인지 아버지도 처음엔 걱정이 많았지만 결국 나를 믿었다”고 말했다. 그의 아버지가 처음 뉴욕에 시그램 본사를 짓겠다고 했을 때 그는 결혼을 해서 파리에 살고 있었다. 당시 유럽에선 장식적 요소를 배제한 현대건축이 막 붐을 일으키고 있었다. 아버지가 보낸 빌딩계획안을 보니 영 아니었다. “아버지가 설계도를 보낼 때마다 계속해서 노!노!노!라고 말하고 반대했어요. 그리고 아버지께 8쪽에 이르는 장문의 편지를 보내 6주만 시간을 달라고 했죠. 한 달은 짧고 두 달은 길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세계 각지를 돌면서 건축가를 찾아 나섰어요. 미즈 반 데 로헤가 바로 내가 찾던 건축가였죠. ‘The less is the more’. 적은 것이 더 많은 것을 보여준다는 것이 미즈의 생각이었고, 내 생각이었어요. 그리고 밀어붙였죠.”

    가장 단순하면서도 우아한 건물로 평가받는 시그램빌딩을 그는 피카소, 미로, 마크 로스코 등 최고의 예술작품으로 채웠다. 처음 설계 때부터 디자인을 한 번도 바꾸지 않은 포시즌즈 식당도 유명하다. 건물 양쪽에 평면 분수대를 만들고 오픈된 공간을 만들자 시민들이 만남의 광장으로 활용을 하고 계단에 모여 앉아 휴식의 장소로 활용했다. 건물과 사람이 소통하는 공간을 만든 것이다. 그는 시그램빌딩을 “건축과 예술이라는 두 가지의 문화가 동맹해서 만든 역사”라고 말했다.

    그는 “건축을 하고 세상을 더 크게 바라볼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 다른 문화를 바라볼 수 있었고 더 넓은 사고를 하게 됐다”면서 “60년을 건축에 푹 빠져 살았다”고 말했다. 그가 건축계에 남긴 것은 하나의 건물이 아니다. 그는 건축가라기보다 건축운동가이다. 현대건축의 선두에 서서 건축문화를 만들고 대중과 건축의 소통을 이끌고 세계의 건축가를 키우는 등 현대건축의 촉매제와 같은 역할을 했다. 캐나다 최고 명예의 훈장(Order of Canada)을 받았고 미국·유럽 등 27개 대학이 그의 공로를 인정, 명예학위를 수여했다. 영국왕립건축사회, 미국건축사회 명예회원, 프랑스 예술문학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10살 때부터 ‘누구의 딸’이 아닌 독립된 존재로 살고 싶었다는 그는 ‘절충’이라는 단어를 가장 싫어한다고 했다. 이도저도 아닌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에 일을 할 때는 항상 확실한 선택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는 “사람들이 건물을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보지 않는 것이 슬프다”면서 “예술은 삶의 기본이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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