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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사람들

외국에서 새로운발상으로 글로벌기업을 상장한 여성한국인 김은미대표

by 달빛아래서 2014. 9. 14.

여성조선] 글로벌 삶에 응답하라

  • 기획·진행 임언영 기자
  • 사진 방문수
  • 입력 : 2014.09.14 06:22

    한국이 아닌 외국에서 새로운 발상으로 글로벌 기업을 상장한 한국인.
    해외로 진출한 기업에 사무실은 물론 비서와 서비스까지 제공하는 기업, CEO SUITE의 김은미 대표다.
    “대한민국이 답하지 않으면 세상이 답하게 하라”고 말하는 당찬 글로벌 여성이다.

    
	[여성조선] 글로벌 삶에 응답하라

    자카르타, 쿠알라룸프, 싱가포르, 상하이, 베이징, 마닐라, 방콕, 그리고 서울. 아시아 대도시를 오가며 12개의 지점을 운영하고 있는 글로벌 기업의 수장인 김은미 대표는 일찌감치 외국으로 진출해서 혁신적인 여성의 삶을 살고 있다. 한국에서도 이름이 많이 알려졌지만, 그녀의 활동 근거지는 인도네시아. 그곳에서 만난 남편과 20년째 결혼생활을 하고 있는 곳도 인도네시아다. 약 일주일 정도의 서울 일정 중에 시간을 내어 만났다.

    김은미 대표는 지난 1997년 오피스 서비스 회사인 CEO SUITE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 세우고, 지금까지 영역을 확장하면서 사업을 이어오고 있다. 다른 나라에 진출하는 기업 등을 대상으로 호텔식 사무실을 대여하고 비서, 통역, 회의실, 법률, 회계 등 서비스까지 대행해주는 일을 한다.

    열정적인 삶을 대변하듯 붉은 옷을 입고 나타난 김은미 대표는 마찬가지로 붉은 옷을 입은 윤영미 아나운서에게 공간을 소개하면서 CEO SUITE에 대한 설명을 해줬다. 두 사람은 동갑내기로, 동시대를 살아간 여자로서, 본인의 삶을 스스로 개척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아직까지 식지 않은 열정으로 공감이 많은 대화를 주고받았다.

    공간을 빌려드립니다
    김 대표를 만난 장소는 그녀가 3년 전부터 운영하고 있는 서울지점이다. 광화문 교보빌딩 전망 좋은 곳에 자리를 잡은 그녀의 집무실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깔끔하고 고급스럽게 꾸민 공간이 CEO SUITE라는 기업의 이미지를 말해준다. 쉽게 이해를 할 수 있다. 공간마다 글로벌 기업 사람들이 화상으로 회의를 나누거나, 미팅을 하거나, 컴퓨터에 앉아서 각자의 업무를 한다. 모두 다른 일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전망이 기가 막히네요. CEO SUITE에 대한 소개 먼저 부탁드려요.
    이곳이 풍수가 좋은 곳이라고 하더라고요.(웃음) 제가 하는 일이 공간사업이에요. 한국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외국에서는 익숙한 문화예요. 제 근거지인 동남아도 그렇고 미국이나 유럽도, 본인이 사무실 운영을 하지 않고 사업을 하는 케이스가 많아요. 요즘은 디지털로 해결하는 일이 많잖아요. 가끔씩 공간이 필요한데, 카페 같은 공간에서 하기에는 프로페셔널하지 않죠. 아웃소싱 시대에 필요한 개념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아요. 장기로 사용하시는 경우도 있고, 1시간만 이용하실 수도 있어요. 사우나, 카페테리아 등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죠.

    대학생들을 위한 스터디 공간이 있는데, 그렇게 이해하면 쉽겠네요?
    그러네요. 민들레영토 같은 공간이 있죠? 그런데 저희는 공간사업에 회사 설립부터 개인 비서, 회계 업무 등 전문적인 자문을 하기도 해요. 아직은 생소하지만 고객 네트워킹 업무도 활발하고요. 칵테일파티, 탱고 파티, 골프투어, 산행 등 다양한 이벤트를 기획해요.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생소한 문화지만요.

    한국 지점을 만든 지 3년째에 접어들었죠? 더 일찍 시작하실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요.
    건물이 없었어요. 제가 인도네시아에서 처음 사업 시작할 때, 서울에는 대우빌딩 하나 정도 있었으니까요. 건물은 한정되어 있고, 부동산에 대한 개념이 투자 식으로 이루어지니까 진입이 쉽지 않았어요. 대기업들은 본인들이 사용하잖아요. 이른바 건물주의 마켓이죠.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갈 비즈니스의 가능성이 낮았죠.

    우리나라에는 독특한 문화가 있죠? 외국이랑 비교하면 어때요?
    제일 어려운 곳이에요.(웃음) 한국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데 좀 늦는 것 같아요. 한국인 정서에서는 비서를 셰어하고 회의실을 공동으로 쓴다는 것이 낯설잖아요. 25년 동안 외국에서 사업을 하다가 한국의 독특한 정서에 부딪히니 쉽지 않아요. 일찍 나가서 산 죄죠.(웃음)

    그래도 좋은 빌딩도 많이 생기고 가능성이 없진 않을 것 같아요.
    대기업에서 관심을 가지기도 하고, 실제로 비슷한 업무를 하는 곳도 생겼어요. 저는 한국의 정서에 맞는 것을 새로 론칭할 계획을 갖게 됐어요. 현지에 맞게 운영하는 것도 중요하니까요.

    
	[여성조선] 글로벌 삶에 응답하라
    호주에서 인도네시아로, 글로벌한 삶
    좋은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시티은행에서 고연봉을 받으며 안정적인 삶을 살던 그녀다. 그런데 입사 1년이 되자 직장생활이 정체되었고 이건 아니다 싶었다. 당시에는 조금 파격이었던 호주 유학을 결심했다. 뉴사우스웨일즈대학교에서 마케팅을 전공하고, 호주 비즈니스센터인 서브코프에 입사하면서 오피스 서비스와의 인연이 시작됐다. 그곳에서 경력을 쌓고 인도네시아에서 본격적인 사업가의 길을 걷게 됐다.

    호주로 간 게 인생을 바꿨죠?
    여자 혼자 유학 가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던 시절이었어요. 그땐 해외여행 자율화 시대도 아니었으니까요. 거의 야반도주로 떠났죠.(웃음) 엄마는 허락을 해주셨는데, 돈을 1원도 안 주셨어요. 은행 다니다가 모은 돈, 한 학기 등록금만 들고 갔어요. 취업이 된 상태도 아니고 그냥 무작정 대학원에 간 거죠.

    에피소드가 굉장히 많겠어요.
    각종 아르바이트를 다 했어요. 영어도 못하는데 동시통역사도 했고요. 제가 사회사업이 전공이었는데, 그중에서 상담심리를 했어요. 호주에서 불법 이민자들이나 사회적 약자들을 만나서 상담을 해드렸어요. 돈을 받을 수 있는 곳을 소개해드리고 돈도 많이 벌었죠. 하숙도 쳤어요. 방을 하나 얻어서 저렴한 가구를 얻어놓고 밥을 해줬어요. 첫 사업이었어요. 먹고 살아야 하니까 생활력이 생겼어요.

    한국도 아니고 호주에서요?
    학교 다닐 때 4년 내내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은행 상품 가입을 권유하는 아르바이트도 했고, 여성복도 팔아봤고, 롯데리아에서 햄버거 뒤집는 일도 해봤어요. 먹고 살아야 하니까 자연히 생활력이 생겼어요. 공부도 못하면서 장학금도 받았고, 열심히 살았어요. 그런데 이게 호주에서 살아가는 데 생활력이 되더라고요.

    성공 DNA가 있으시네요.
    호주에서 운 좋게 직장을 얻었어요. 당시 한국에서는 여자들이 취업이 잘 안 됐어요. 비서직 말고는 잘 없었어요. 나이 많은 여자는 안 되고, 제가 전공한 사회복지는 전문성이 없더라고요. 호주에서 취직자리를 알아봤어요. 서브코프라는 회사였는데, 공간사업이라는 것에 끌렸어요. 굉장히 재미있는 일이었고, 아시아 쪽에 전망이 있어 보였어요.

    경쟁 회사를 세우신 셈이네요?(웃음)
    호주에서 억대 연봉을 받으면서 승승장구했어요. 아시아 마켓을 담당하면서 성공적으로 기반을 잡았어요.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제 역량을 발휘해도 더 이상 승진이 안 되더라고요. 아시아 지역 총괄을 하고 싶었는데, 인종차별의 벽도 있었고요. 홧김에 회사를 나왔죠.(웃음) 그런데 제가 받던 월급을 주면서 저를 우대해 데려갈 회사가 없었어요. 이 일을 계속하고 싶은데 갈 곳은 없으니, ‘내가 나를 고용해야겠다’ 생각했어요. 그래서 회사를 만들게 된 거예요.

    자카르타가 가장 유망한 곳이었나요?
    남편이 살거든요. 남편이 인도네시아 사람이에요. 지금도 집은 자카르타에 있어요.

    글로벌 마인드 가진 가족 지원군
    그녀는 인도네시아인 남편, 시어머니와 함께 자카르타에 산다. 시어머니는 매일 그녀를 살뜰하게 챙겨주는 것은 물론 아들의 양육을 전적으로 맡아준 일등공신. 그녀가 글로벌 경영인이 될 수 있었던 데는 글로벌한 마인드를 가진 가족의 든든한 지원이 컸다.

    결혼스토리가 궁금해요.
    외로워서 했어요. 만 서른세 살에 했는데, 당시에는 굉장히 늦은 나이였어요. 그땐 여자들이 저처럼 거세게 일하는 거 싫어했어요. 한국 남자들은 저 같은 스타일을 특히 싫어하는데, 저희 아버지가 외국인 남자는 절대 안 된다고 하시는 분이셨어요. 외로웠어요. 남편은 골프장에서 만났어요. 인도네시아에서는 주말에 외로우니까 골프를 많이 치게 되거든요. 친구들과 함께 일 년 반 정도 골프친구 하다가 친해졌어요.

    아들은 한 명 있으시고요?
    늦은 나이에 결혼을 해서 빨리 낳으려고 했는데, 힘들게 낳았어요. 유명한 병원은 다 찾아다니면서 애를 썼어요. 이상은 없는데 임신이 잘 안 되더라고요. 출장을 가다가도 의사에게 연락이 오면 남편을 만나서 임신을 위한 노력을 했어요. 시험관 아이를 세 번 실패하고 포기하는 순간 아이가 딱 들어서더라고요.

    귀하게 얻은 아들이네요.
    사업하고 미친 듯이 달릴 때라 석 달이 되도록 임신한 것도 몰랐어요. 출산 때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는데요. 그때 인도네시아가 민주화로 난리가 났었어요. 아이를 낳기로 한 병원이 폭격을 당해서 출산 하루 전에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들어와서 낳았어요. 그때 저 뉴스에도 나왔어요. 공항에 나온 취재진이 “인도네시아에서 임신부가 도착했습니다” 하면서 절 찍어갔어요.(웃음)

    양육이라는 것이 쉽지만은 않으셨죠?
    제가 주책인 게 방학 때마다 아이를 끌고 다녔어요. 아들인데 유별났거든요. 호텔이 흔들릴 정도로 존재감을 가지고 있어서 힘들었어요. 덕분에 어느 나라에 가도 사람들과 쉽게 친해지고 적응도 잘하고, 그런 능력은 생긴 것 같아요. 사업도 좋아하고요. 방학 때는 인턴을 해요. 커피 나르고 설거지 하고 그런 거요.

    외국 시어머니는 한국과 다른가요?
    아이는 시어머니가 봐주셨어요. 어머니 인생의 낙이에요. 정말 좋아하셔서 아이를 떼어놓지 않으실 정도예요. 저는 일하느라 바빠서 제 손에 아이가 있으면 사고가 나고 그랬죠. 편한 점도 있었지만, 그만큼 아들과 교류가 없어서 놓친 것도 많아요.

    저도 아들이 둘인데, 자녀 교육이 참 어렵죠.
    아들이 사춘기를 심하게 겪었어요. 일하는 엄마들은 모두가 공감하실 거예요. 함께하는 시간이 많지 않으니 자연스럽게 트러블이 생기더라고요. 부모가 뭔지 늦게 배우게 됐어요. 아이와 소통하는 법, 눈높이 맞추는 법 등을 최근에야 알게 되었어요. 요즘은 발 마사지를 해줘요. 자연스럽게 스킨십을 하면서 가까이 지내고 싶어서요.

    대표님의 어머니가 대단한 분이셨다고 들었어요.
    네, 어머니 교육 덕분에 제가 이 자리까지 왔어요. 교육열이 대단하셨거든요. 유명한 화가들 전시는 꼭 보여주셨고 책이나 글짓기, 영화 등 많은 것을 접할 수 있게 해주셨어요. 대신 저는 무조건 일등을 해야 했죠. 공부와 책 읽기에만 집중하게 하시고 노는 걸 허락하지 않으셨어요. 그래서 저는 이 나이가 되도록 놀지도 못하고 바보형 인간이 되었어요.

    나이가 들어도 열정적인 삶
    누구나 살면서 나이가 주는 위압감을 느낀다. 김 대표 역시 그런 감정을 느낄 때가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자신의 삶을 혁신적으로 살아온 만큼 여전히 뜨거운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다.

    같은 나이지만, 참 아름답고 젊으세요.
    마찬가지신데요.(웃음) 저는 예전에는 쉰이 넘으면 여자도 아닌 것 같았어요. 나이가 주는 위압감이 있더라고요. 그런데 지금의 제 목표는 죽을 때까지 섹시하기예요. 관 속에 들어갈 때까지 섹시하기. 저는 가족들에게 할머니가 돼서 관 속에 들어갈 때, 흰옷 말고 빨간 옷 입혀달라고 했어요. 꽃도 흰색 꽃 말고 빨간 장미꽃으로 꾸미고, 흥겨운 음악을 틀어달라고 주문을 해놨어요.(웃음)

    저랑 생각이 똑같네요!
    동갑내기의 통함이 있네요.(웃음) 저는 쉰이 넘어서야 여성성을 찾았어요. 예전에는 헤어스타일도 짧은 쇼트커트 스타일만 고수했어요. 정장도 어깨가 각진 것만 입었고, 목소리도 굉장히 컸어요. 여자로서 사업을 하려다 보니 의식적으로 그렇게 살기도 했어요. 중성적으로요. 그런데 요즘은 페미닌하다는 이야기를 듣게 됐어요.

    계기가 있다면요?
    아들이요. 아들이 자라서 사춘기에 접어드니 엄마를 평가하기 시작하더라고요. 다른 엄마들과 비교도 하고요. 처음으로 ‘엄마’라는 것에 대한 생각을 진지하게 해봤어요. 엄마는 항상 부드러워야 하고 참아야 하는 존재더라고요. 아들이 여성성을 돌려줬어요. 제가 양육을 직접 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아들한테 얻은 게 많아요.
    결국은 엄마라는 이름을 버릴 수가 없네요. 그게 여성 혁신가들의 삶이자 가장 빛나는 가치가 아닐까 싶어요.

    윤영미는… SBS 1기 아나운서 출신으로, 2010년부터는 프리랜서로 활동하고 있다. SBS 스포츠 프로야구 중계로 국내 방송 최초로 여성 캐스터 1호 등 아나운서로서 혁신적인 길을 걸어왔다. MBN <아궁이>, JTBC <집밥의 여왕> 등 다양한 프로그램에 출연 중이고, 저서로 <SBS 아나운서 윤영미의 열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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